한중연 ‘장서각 고문서 수집 반세기-500년 조선에서 찾은 보물’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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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연 ‘장서각 고문서 수집 반세기-500년 조선에서 찾은 보물’ 특별전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2.18 2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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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전국 각지 돌며 수집한 주요 고문서 국회 특별전 개최
- 전국 방방곡곡 돌며 수집한 고문서와 기증‧기탁 받은 유물 등 보물 5건 포함 총 14건 공개
- 방치된 박스 속에서 발견한 원나라 법전 ‘지정조격’부터, 문중에서 보관하던 ‘동의보감’까지 고문헌 수집 성과와 수집과정에서 만들어진 에피소드 소개
- 2월 20일부터 3일간 국회의사당 국회의원회관 2층 제2로비에서 개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우리나라 기록문화유산에 대한 국회와 정부의 관심 및 지원 촉구는 물론 수십 여만 점의 선대 자료를 기증‧기탁한 후손들에게 보답하는 뜻깊은 특별 전시회를 마련한다. 전시는 오는 2월 20일부터 3일간 국회의사당 국회의원회관 2층 제2로비에서 개최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1978년 개원 이래 반세기 동안 고문서의 가치 발굴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그 일환으로 오는 20일부터 3일간‘장서각 고문서 수집 반세기-500년 조선에서 찾은 보물’특별전시를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국회 교육위원회와 합동해 우리나라 고문헌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특히 500년 종가에서 보관해오던 12만여 점의 고문서 및 유물을 장서각에 기증‧기탁한 후손들의 공헌과 도움에 감사함을 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국회 특별전, 장서각 고문서 수집 반세기-500년 조선에서 찾은 보물】

□ 유물은 총 14건이 전시되며, 고문헌이 국가의 문화자산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 뜻을 함께해 준 주요 종가에 맞춰 총 5부로 나눠 구성됐다.

○ [제1부] ‘경주 경주손씨 송첨종가: 우연한 발굴’에서는 경주 양동마을 500년 종가 경주손씨 고택의 라면상자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지정조격』의 사연과 보존처리를 거쳐 보물로 지정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 전시유물(3건) : 지정조격(보물), 손소 적개공신 교서(보물), 손소 적개공신 화상(보물)

2002년 『지정조격』 발견 당시 사진<br>
2002년 『지정조격』 발견 당시 사진

경주손씨 송첨종가는 손소(孫昭) 이래 여러 대에 걸쳐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조선의 대표적인 명가이다. 세거지(世居地)인 경주 양동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여러 차례 조사되어 그 결과가 학계에 보고되었다. 조선 초기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 경자자(庚子字)로 1423년(세종 5)에 간행된 『통감속편(通鑑續編)』, 1510년(중종 5) 손소의 7남매가 부모 사후에 재산을 나누고 합의하면서 작성한 분재기(分財記) 등 16세기 이전 조선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이 가문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들을 개인과 문중에서 보관하기에는 도난과 훼손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미 경주손씨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문화재들은 여러 차례 도난당하는 일이 있었으며, 2001년 12월 손소의 묘소가 도굴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송첨종가의 제보에 따라 다시 자료조사를 실시했다. 자료는 종가의 방앗간 옆 창고에서 조선 초기 고문서부터 고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가 발굴되었다. 특히, 세계에서 유일한 원나라 최후의 법전 『지정조격(至正條格)』은 종이박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송첨종가 자료 2,500여 점이 2003년 장서각에 기탁되었으며, 이때 발굴한 지정조격은 202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지정조격 보존처리

『지정조격』은 제작 후 6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뎌왔기에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이 책은 사침(四針)의 선장(線裝) 형식이었지만 책실이 끊어지면서 사침의 흔적만 확인할 수 있었다. 뒤표지가 유실되고 본문은 습기와 얼룩으로 인한 오염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마모와 찢김 등의 손상이 심했다. 

분석 결과 본문의 종이가 단섬유인 대나무로 만들어져 치밀하고 단단한 구조를 지닌 고서라는 특징이 밝혀졌다. 대나무 섬유는 가늘고 짧은 섬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고서의 닥섬유와 달리 종이의 강도가 약하여 많은 손상이 따르는 약점이 있다. 분석을 바탕으로 해체 후 복원을 진행했다. 

손상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표지와 본문을 낱장으로 분리하고 본문의 먼지와 오염물질 등을 제거했다. 상온의 탈이온수(deionized water)를 사용하여 건식 및 습식클리닝을 정밀하게 진행하였다. 보강지와 배접지는 원본과 유사한 색상의 보존성이 좋은 한지를 적용하여 본문의 결실(缺失) 부분을 보강했다. 대나무 섬유의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섬유를 보강해 주고 건조하였다. 건조가 완료된 표지와 속지는 본래의 크기와 순서를 맞추어 중첩한 후 기존과 동일한 형식으로 다시 장정(裝訂)하여 마무리하였다.

○ [제2부]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 가치의 재발견’에서는 500년 임청각 종가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굳건히 자료를 지켜낸 맏며느리의 역할과 조선시대는 물론 독립운동에 관해 중요한 내용을 담은 기탁 자료를 소개한다.
* 전시유물(3건) : 이준형 유서, 박우종이 이상룡에게 보낸 한글편지, 허주부군산수유첩

안동 고성이씨는 세조 연간에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에 입향한 이래 대대로 법흥동 소재 임청각(臨淸閣)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500여 년을 세거하고 있는 명가이다. 16세기에 건립한 임청각은 보물 182호이다. 

고성이씨는 많은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였고, 임란 의병과 한말 을미 의병을 일으키며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을 배출한 것도 이러한 가문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이상룡을 비롯한 가문의 구성원들이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500여 년간 유지해 온 경제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지만 영남 일원에서 이씨가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임청각은 조선시대 영남지방, 특히 안동을 대표하는 명가였다. 이런 배경에서 장서각은 1993년부터 고성이씨 임청각을 방문했지만 매번 대문이 잠긴 채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1997년 여름 드디어 안동이 아닌 서울에서 임청각의 고문서를 수집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고문서 연구에 집중하는 장서각으로서는 수집한 자료 중 상당 부분이 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임청각의 고문서를 간직해온 사람은 이상룡의 증손자인 이항증(李恒曾)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독립운동가 허은(許銀, 1907~1997) 여사였다. 이 가문의 고문서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남자들을 대신해 문서를 지킨 그녀의 공이 지대하였기 때문이었다. 2004년 5,700여 점의 모든 자료를 장서각에 기탁하였다.

○ [제3부] ‘남원 순흥안씨 사제당: 지극한 보물’에서는 500년 사제당 종가의 가보 기묘제현수필과 기묘제현수첩의 표지를 접착 시트지로 처리했다가 표지의 훼손이 발생하자 장서각에 자료 보존을 의뢰했고, 장서각의 과학적 보존처리 방법을 통해 가문의 가보가 우리나라의 보물로 지정된 내용을 소개한다.
* 전시유물(2건) : 기묘제현수필(보물), 기묘제현수첩(보물)

순흥안씨는 안향부터 안처순(安處順, 1492~1534)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연이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사제당 안처순의 종가는 호남의 대표 명가 중 하나로 성장했다. 

안처순은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급제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1518년(중종 13) 그가 노모 봉양을 위해 구례현감으로 부임하자, 기묘사림들은 전별 시문을 써 주면서 도학의 정진과 향촌 교화를 당부하였다. 남원의 사제당 종가는 이 당시 안처순이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사림(己卯士林)과 주고받은 시문 및 서간을 『기묘제현수필』과 『기묘제현수첩』으로 제작하고 가보로 간직했다. 조선시대 동안 명사들이 이들 가보를 친견하기 위해 종가를 방문하면서 종가의 위상이 높아지자 종가는 보존에 아주 유의하며 500년 동안 전수했다. 

2004년 장서각은 호남지역 명가의 자료를 조사하던 중 사제당 종중 관계자를 만났다. 종가는 가보가 보물로 지정되자 잘 보존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던 접착시트지를 표지에 부탁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훼손이 심화하는 사실을 깨닫고 장서각에 대책을 상의했다. 장서각은 즉시 자료를 안전한 수장고로 옮기고 보존과학 측면에서 대책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제당 종가는 2010년 안처순 등 선조들이 남긴 자료의 보존과 연구를 위해 장서각에 『기묘제현수필』, 『기묘제현수첩』을 비롯한 고문서 700여 점을 기탁 하였다.

○ 기묘제현수필 보존처리 

이 자료는 1830년도에 한 차례 보수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기탁 당시 전체적으로 변색과 오염 등의 손상이 진행되고 첩의 속지 중앙부분이 갈라져 분리되어 있었다. 특히, 앞과 뒤표지는 필름계열의 접착시트지가 부착되어 시트의 접착제가 오염과 함께 표지에 스며들어 경화되어 있었다.
접착시트지는 소장처에서 필첩을 보호하기 위해 앞·뒤표지에 부착하였다. 접착 후 시간이 지나면서 경화가 진행되면서 필름층은 들떠 있고 접착제는 오염된 표지에 흡수되어 변색되었다. 
보존처리 당시 필름층은 접착력이 상실된 상태였다. 먼저 보존처리용 소도구를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제거하였으며, 고착이 심한 부분은 낮은 온도의 열을 이용하여 필름을 분리하였다. 분리한 뒤 소량의 정제수로 접착성분을 제거하였다. 특히 표제의 가장자리 부분은 마모가 심하고 오염성분이 접착시트지에 고착되어 있었으므로 오랜 시간을 두고 주의하여 제거하였다. 접착시트지의 제거를 통해 표지의 원형을 되찾고 그에 따른 추가적인 손상을 방지하였다.

필첩의 본문 부분은 해체, 클리닝, 결손부 메움 등의 과정을 거쳐 다시 장정하였다. 첩의 순서, 본지의 위치 등을 미리 사진 촬영하여 보존처리 후 원형대로 장정할 수 있었다. 
해체 후 첩의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건식클리닝과 정제수를 사용한 습식클리닝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결손부는 필첩과 유사한 재질의 메움지를 천연 염색하여 보강하였다. 보존처리가 끝난 본문은 기존의 배접지(褙接紙)와 유사한 한지로 방향을 달리하여 배접하여 강도를 강화하고 다시 첩 형식으로 연결하였다. 건조가 완료된 표지와 본문은 본래의 크기와 순서를 맞추어 재장정하여 마무리한 다음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수장고에 보관하였다.

○ [제4부] ‘아산 선교 장흥임씨 종가: 보존을 향한 협동’에서는 400년 역사의 종중에서 선대의 초상화와 고문서의 훼손과 도난을 우려해 장서각에 자료를 기탁하고 이후 관련 연구 및 종중의 자료 보존을 위한 장서각의 노력을 소개한다. 
* 전시유물(3건) : 임욱 초상, 1735년 임욱 노정기, 1735년 임욱 고신

장흥임씨 종가는 18세기 후반부터 충남 아산의 선교(船橋)에 정착하여 세거하고 있는 명가이다. 아산 장흥임씨는 본래 경기에서 세거하면서 임식(任湜, 1618~?) 대부터 4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무과를 통해 출사하면서 무반가문으로 성장했다. 그 후 18세기 후반, 선대부터 전답(田畓) 등의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한 덕분에 염전까지 경영할 수 있었던 선교에 정착했다. 아산에서 장흥임씨는 종계(宗契)와 상계(喪契)의 운영을 통해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지며 지역 사족 가문으로서 지위를 유지했다. 종가에서 보관하던 자료는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 1978년에 건립한 임욱의 영정각(影幀閣)으로 옮겨졌다.

2004년 5월, 자료의 훼손과 도난을 우려하던 종가의 후손들은 종중 결의를 거쳐 장서각을 찾았다. 종가와 종중은 장서각의 연구와 보존 역량을 신뢰하고 보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 직접 자료연구를 의뢰했다. 장서각은 2008년 『고문서집성』으로 자료를 학계에 공개하고 초상화 등에 대한 보존과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2010년 1,000점 이상의 모든 자료를 장서각에 기탁 하였다. 

임욱(任勗, 1680~1736)의 초상이다. 사모(絲帽)를 쓰고 쌍학흉배(雙鶴胸背)가 부착된 단령(團領)을 입은 채, 교의(交椅)에 앉아 족좌대(足座臺)에 발을 얹은 모습이다. 임욱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당시 안성과 죽산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때 받은 『분무원종공신녹권(奮武原從功臣錄券)』도 현재 전한다. 초상 제작을 위해 유지(油紙)에 그린 초본이 함께 남아 있다.

임욱이 함경도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시찰하기 위해 거쳐 간 지역을 기록한 문서이다. 1735년 삼수도호부사로 부임한 시기에 작성했다. 함흥부~서수라보, 북청부~혜산진 두 노정에서 경유한 곳과 구간별 거리를 기록했다. 문서 말미에는 군기(軍器)의 점검, 시사(試射) 등 각지에서 살피고 시행해야 할 내용을 간략히 기재했다.

○ [제5부] ‘군포 동래정씨 동래부원군 종가: 명가의 명예’에서는 500년 종가에서 선대의 모든 자료를 지역사회에 위탁했다가 장서각의 연구와 보존 역량을 신뢰하고 2015년에 4천여 점의 모든 자료를 장서각에 기증한 내용을 소개한다.
* 전시유물(3건) : 정학묵 금관조복, 동래군필적, 동의보감(장서각본 동의보감 복제본(국보))

조선전기 명신으로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동래부원군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이다. 

정난종이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고 부인과 함께 이곳에 묻혔고, 그 장자 정광보(鄭光輔, 1457~1524)가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세거한 것이 오늘날까지 500년을 넘어선다. 동래정씨 가문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정승만 17명, 문과급제자는 무려 198명을 배출한 명가이다.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도 위당 정인보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종가는 소중한 가전 자료를 지역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90년대 말 군포시 등에 위탁을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당시까지 자료 연구와 보존의 환경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2003년 종가는 군포시를 통하여 장서각에 연구를 의뢰하였다. 장서각은 이들 자료를 연구하여 학계에 공개하고 중요 자료에 대한 보존과학적 접근을 달성했다. 동래부원군 종가는 2011년 5월 종택과 전답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상 증여하였다. 그리고 2015년에는 집안에서 전수하던 고문서와 유물 4천여 점을 장서각에 기증하였다. 단지 집안의 가보와 재산이 아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잘 보존하고 함께 공유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500년 명문가의 고귀한 결정이었다.

정학묵(鄭學黙, 1829~1903)이 착용한 조복이다. 조복은 양관(梁冠)·의(衣)·상(裳)·중단(中單)·대대(大帶)·혁대(革帶)·후수(後綬)·패옥(佩玉)·홀(笏)·화(靴)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진에는 확인할 수 없지만 폐슬(蔽膝)도 존재한다. 조복은 붉은색의 조복과 금색의 양관 등으로 이루어져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 일컬어지며, 국가적인 경사나 명절 등에 거행한 축하 의식의 예복이다. 정학묵은 1860년(철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당상관인 삼사의 승지와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902년(고종 39)에는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에 오르게 된다. 이 금관조복은 운학문(雲鶴紋)과 금환(金環)으로 장식된 후수와 육량관, 상아홀, 서대(犀帶) 등 대한제국기 고위 관직자의 실제 복제 사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세종대 문신 이보정(李補丁, 1393~1456)의 신도비(神道碑) 탁본으로 정난종의 필적이다. 이보정은 1420년(세종 2) 문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보정 신도비는 이숙함(李淑瑊, ?~?)이 지었고 정난종이 썼다. 1481년(성종 12) 건립된 이 비의 탁본은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를 바탕으로 일가를 이룬 정난종의 원숙한 필체를 보여준다. 이보정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그 아들 이숭원(李崇元, 1428~1491)의 묘소와 함께 남아 있으나 신도비의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탁본 또한 이 『동래군필적(東萊君筆跡)』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없어, 조선전기 명필 정난종의 글씨는 물론 우리나라 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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