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발전/불평등, 자유주의, 찰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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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불평등, 자유주의, 찰스 테일러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2.1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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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36강_ 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의 「경제 발전과 자유주의의 문제」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다섯 번째 섹션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제36강 고세훈 교수(고려대 공공행정학부)의 강연의 서론과 본론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경제 발전/불평등, 자유주의, 찰스 테일러


고세훈 교수는 한 학자의 말을 빌려 “복지 국가 집산주의(welfare state collectivism) 테제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neoliberal individualism) 반테제의 세례를 받으면서 복지 국가 개인주의(welfare state individualism)로 종합을 이뤘다”라고 작금의 현실을 진단한다. 다시 말하여 “현대 사회가 공동선과 대비된 수렴선/재(convergent goods) 개념, 곧 원자화된 개인들 이해관계의 “우연하고 잠정적인” 총합에 기반”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제 발전과 자유주의의 관계를 살핀다고 할 때, “발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유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에 닿게” 되는바 “여기서는 통상적 인식에 따라 경제 발전의 주 내용으로 성장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 이유는 “발전을 성장의 문제로 파악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역량을 중시하는 적극적 자유의 관점에서 살피되”, 이 같은 논의가 “자유에 대한 규범적 입장들 간의 예상되는 공방으로 기우는 것을 가능하면 비껴가기 위해, 특히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조야한 소극적 자유주의에 집중함으로써 허수아비를 때린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이런 입장을 좇아, “자유주의의 내부 비판자로서 지난 반세기 자유주의를 포함하여 도덕철학과 정치사상에 관한 깊고도 폭넓은 통찰을 제시해온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관점에 기대”어 “경제 발전에 관한 자유주의적 사고의 한계와 가능성을 논의”한다. 

 

지난 01월 14일, 고세훈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3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서론

최근 옥스퍼드의 크라우치(Colin Crouch)는 헤겔의 논지를 빌려, 복지 국가 집산주의(welfare state collectivism) 테제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neoliberal individualism) 반테제의 세례를 받으면서 복지 국가 개인주의(welfare state individualism)로 종합을 이뤘다고 진술한 바 있다. 현대 사회가 공동선과 대비된 수렴선/재(convergent goods) 개념, 곧 원자화된 개인들 이해관계의 “우연하고 잠정적인” 총합에 기반한다고 진단한 테일러(Charles Taylor)의 통찰을 연상시키는 지적이다. 

경제 발전과 자유주의의 관계는 이 둘을 각각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복잡하게 얽힌다. 경제 발전을 성장 개념 중심으로 사유하면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대신 자유주의를 역량(capacities) 중심으로 해석하는 입장과 충돌할 테고, 경제 발전에 성장을 넘은 넓은 의미를 담아내면 성장을 중심 개념으로 바라보는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가 지니는 한계가 부각되는 반면 적극적 자유주의 개념과는 문제의식과 해소 방향 등 논의의 지평을 적지 않게 공유할 수 있다.

따라서 발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유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에 닿게 된다. 협의의 발전을 적극적 자유 입장에서 비판하거나 광의의 발전을 소극적 자유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일은 서로의 전제와 가정을 둘러싼 규범적 논란의 지루한 순환—존재론적으론 원자론(atomism)과 전체론(holism) 간에 그리고 정책 차원에선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 간의 공방을 둘러싼—이라는 수렁에 빠지기 쉬우며, 이 점은 발전주의와 자유주의의 내포와 외연이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갈린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는 통상적 인식에 따라 경제 발전의 주 내용으로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발전을 성장의 문제로 파악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역량을 중시하는 적극적 자유의 관점에서 살피되, 이런 논의가 자유에 대한 규범적 입장들 간의 예상되는 공방으로 기우는 것을 가능하면 비껴가기 위해, 특히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조야한 소극적 자유주의에 집중함으로써 허수아비를 때린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내부 비판자로서 지난 반세기 자유주의를 포함하여 도덕철학과 정치사상에 관한 깊고도 폭넓은 통찰을 제시해온 찰스 테일러의 관점에 기대, 경제 발전에 관한 자유주의적 사고의 한계와 가능성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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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테일러, 경제 발전, 불평등

테일러가 경제 발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도덕과 정치철학 논의에서 몇 가지 함의를 추론해볼 수 있다. 원자주의적 환원론에 대한 그의 비판적 입장으로부터 성장 중심주의의 문제점들을 살피고, 그의 적극적 자유와 공화주의 사상으로부터 자유주의의 국가 중립성 개념의 허점들을 검토할 수 있다. 이 둘이 모두 분배 정의나 불평등에 대한 테일러의 관점에 닿게 됨은 물론이다. 테일러 논리를 확대하면 자유주의는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두고 인식론에 치중하고 시장과 국가 개념을 위요한 경제 발전을 어떻게 이루는가와 관련한 방법론적 문제를 중시하는 반면, 경제 발전이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존재론적 질문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A. 센이 발전이 성장을 넘어 (적극적) 자유 개념을 담은 의미로 정의돼야 한다고 말했던 맥락이다.

테일러의 관찰에 따르면 성장 중심 사회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는 양가적이고 모호하다. 성장은 과거의 실업과 결핍의 악순환 대신 풍요와 안락을 가져다주며, 사회에 지속적인 활력 곧 창조와 혁신의 정신을 불어넣고, 공동체의 보다 큰 통합을 위한 촉진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비 사회의 성취 이면에는 엄청난 규모의 소수가 여전히 풍요 사회에서 소외된 채 성장의 외부자로 남아 있다. 이들에게 부는 적절히 낙수되지 않으며, 성장의 대부분은 이미 풍요한 사람들에 의해 선점되고, 기술 발전은 “빈곤의 비용”을 상승시킨다. 

테일러는 이러한 상황을 중재하기보다는 그런 모호성 저변에 있는 인간 삶의 기본 특징들을 파헤침으로써 그가 “현대적 정체성(modern identity)”으로 부른 것이 현대 사회의 정당성 문제를 설명하는 중심 개념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적 정체성이란 현대 세계가 본래적인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은 탈신비화된 세계이며 자아는 “위대한 존재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탈개입된 자아로서 세상을 하나의 객체로서 바라본다는 개념에 관계된다. 

전근대인에게 내가 속한 외적 질서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필수적인 지평이었고, 나 혼자서는 단지 그림자, 텅 빈 껍질로서만 존재했으니, 그때 나는 일종의 무(nullity), 비존재(non-existence), 사실상 죽음(virtual death)의 상태에 떨어진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일단의 내적 추동, 목적, 욕망과 열망에 의해 특징짓거니와, 이것들을 명료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내 정체성의 지평은 내적 지평이다. 현대인에게 정체성의 지평은 내면에서 발견돼야 하고, 전근대인에게 그것은 외부에 있다.

 

테일러에 따르면 현대인에게 정체성의 지평은 내부에서 발견돼야 하거니와, 이러한 정체성의 이전(移轉)은 적절하고 성공적인 인간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켰다. 한편에 사물의 질서 속에서 내 위치의 확립이 있고, 다른 한편에 내게 내재하는 욕망들의 성취가 있다. 나의 성취 여부는 우주적 패턴과의 조화 문제가 아니라, 나의 내적 필요와 욕망에 답하는 감정적 삶의 문제로서, 이것이 선한 삶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테일러가 현대인의 특징으로 묘사한 “진실성의 윤리(ethics of authenticity)”, 곧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명령의 배후에는 자아가 된다는 것은 결국 개인적 프로젝트이며 진실된 삶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사회경제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소비 사회가 주는 매력은 모든 현대인들의 열망과 엮인다. 그것이 허용하는 사적 공간은 매개되지 않은, 곧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삶을 위한 조건이다. 그에 따라 기업의 목적이 축적과 이윤의 재투자를 통한 성장에 두어질수록 욕망들의 우선순위와 무관하게 설정된 양적 성장의 목표치는 끝없이 갱신되고, 보다 많은 소비재의 취득이 삶의 중심적 가치로 인식된다. 이 모두가 선한 삶의 이미지로 채색되고 정당화되는 사이에 테일러가 강조했던바, “[강한 평가들의] 우선성에 대한 집단적 침묵,” 혹은 “우선순위 개념의 중단”이 내면화된다.

개인과 핵가족의 소비적 열망이 급격하게 증가되고 개개인의 소비 능력이 실력과 성공의 지표가 되는 상황에서, 공동의 제도적 구조는 집단적 도구의 성격 안에서 이해되고, 사회는 개인적으로는 확보할 수 없는 이익들을 공동의 행동을 통해 획득하려는 개인들의 집합체로서, 개인들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현장(locus)이 아닌 도구로서 간주된다. 행위는 집단적이되, 동기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남아 있어서 공공선은 “개인적 효용들의 총합”을 통해 형성되고 또 그렇게 정의된다. 가령 사람들이 국방, 경찰, 소방 등을 통해 다양한 위험으로부터 누리는 안전이 공공재란 이름으로 제공되지만, 이런 재화/선을 “어떻게 공여해야 하는가”에 온통 초점이 맞춰져 있고 “무엇이 그것들을 선한 것으로 만드는가”와 아무 관련이 없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런 재화들로부터 확보된 안전이란 애초에 공공선 개념과는 전혀 다른 원자주의적 존재론에 입각한 것이다. 그가 공공재 대신 수렴재 혹은 수렴선이라는 용어를 택한 이유거니와 “부분들로 분해될 수 없는” 사회적 선 혹은 공동선과는 무관하며, 수렴과 집합의 과정에서 공공선을 지향하는 도덕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경제 성장은 테일러의 수렴재(수렴선) 개념에 정확히 일치하거니와, 각자의 이익의 총합, 경제적 안전과 번영에 대한 수많은 개인들의 기대가 수렴시킨 기대 혹은 현상으로서, 애초에 공동체적 인식이나 공공선 개념은 무관하거나 거기에 부재한다. 

테일러가 보기에 수렴선으로서 성장 중심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의 ‘사회적’ 결과에 대해서 애초에 침묵한다는 점이다. 성장이란 수렴선은 평등/불평등이란 공동체적 상상에 근거한 관계 개념과는 피차 겉돌되, 언제든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모두 인간 삶을 직조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테일러가 ‘복지주의’에 대해 말할 수 없이 비판적 태도를 보인 것도 복지 공여가 공공선 개념 아닌 수렴선에 의존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복지주의적 관점(welfarist perspective)에서 사회는 그저 도구적으로 취급되는데, 그것의 정책적 입장이, 특정의 가치와 목적에 준해 선하게 행동하는(acting well) 문제가 아닌 올바로 사고하는(thinking straight) 문제, 곧 절차적, 논리적 문제로 귀착되면서, 복지주의가 또 하나의 도덕적 주장이라는 점은 쉽게 은폐된다. 테일러에 따르면 공공선이란 것이 관계적 성격을 띤 것이고, 진정 환원 불가한 사회적 선/재화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복지주의는 공동선에의 정치적 열망을 왜곡한다. 이런 관점은 공공 개념에서 출발한 복지 국가의 정신이 자유주의의 오랜 실험을 거치면서 공리주의적 계산에 밝은 개인들에 의해 지탱된다는 관점과 맥을 같이하며, 복지 국가의 정치적 불가역성이 바로 이런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해관계에 곧바로 닿는다.

더욱이 인간의 자기 이해, 곧 정체성과 자유롭고 자율적인 도덕적 주체로서의 역량은 공동체의 관행과 삶, 구성원들 간의 교류를 통해서 획득되고 성숙하는 문화적 산물이다. 테일러가 자아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대화적 자아(dialogical self)” 혹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위치한 “맥락적 자아(situated self)”뿐임을 언급하며 자아의 정체성이란 절대적 상태가 아니라 오직 점진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는 무엇임을 강조한 사정이 이와 무관치 않다. “자유로운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특정의 사회와 문화 안에서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 전반의 형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공동체로의 소속이 개인적 자유의 필요조건이라면 자신을 자유로운 개인으로 긍정하는 이는 그런 정체성이 가능하게 되는 사회를 완성하고 회복하고 혹은 유지할 의무를 ‘이미’ 지니기 때문이다. 수렴적 선으로서 성장 중심 담론이 지배적인 사회가 이런 관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수렴재로서의 경제 성장이 분배와 관련해 던지는 부정적 함의, 혹은 개인을 재산권의 배타적 소유/행사자로서 간주하고, 고유의 역량과 목적을 지닌 독립된 존재로 파악하는 한 자유주의의 반분배적, 불평등적 함의는 명백해 보인다. 수렴재 개념이 함축하는바, 개인별 역량 차이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하고, 몫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지, 즉 고능력, 고기술, 고재능 사람들에게 더 큰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소위 ‘기여 원칙’에 따르면 소득 평등이나 필요에 따른 분배 개념은 거부돼야 하거니와, 보상의 균등은 마치 나의 비상한 역량이 내 소유가 아니라 사회에 속한 것처럼 나를 취급함으로써 나의 “양도 불가한” 권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성장론자들이 애용하는 낙수 이론은 빈자의 상대적 지위가 아니라 절대적 조건의 향상에 초점을 둔 것이며 거기에서 불평등은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더욱이 공공 제도들이 단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성장은 오히려 분배의 악화를 가져오고 불평등은 거의 무제한적으로 용인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른바 “풍요의 역설(paradox of affluence)”을 지속적으로 맞보고 좌절하면서도, 더 이상 커지지 않는 파이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분배적 충동(distributional compulsion)”에 더욱 매몰된다. 수렴재로서의 성장 논리에 익숙한 개인들의 ‘합리적’ 행태일 것이다.

평등은 재앙적일 뿐 아니라 불의하며 불평등이 성장을 위해 오히려 기여한다는, 영국 사상가 토니가 일찍이 탄식한바, “불평등이 하나의 종교처럼 돼버린” 오늘의 상황이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런 상황이 방치되면 민주 정치의 지속적 발전 자체가 위협받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후 서구 사회는 지속적인 급속한 성장을 통해 이런 긴장을 회피해올 수 있었지만, 일련의 경제 위기 상황이 보여주듯 지속적 성장이 난관에 부딪칠수록 긴장이 재차 고조되고 더 이상 사회가 시민들의 자발적인 충성과 규율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심화되면, 저항은 쉽사리 도덕적 저항이 되고 체제 자체가 불합리하고 불의하다는 인식, 정치적 정당성의 쇠락 혹은 위기의식이 부상한다.

교역과 공동 숙의 등 자유 의식을 배양하는 자유주의의 제도들로 인해 과도한 불평등이 무작정 방치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은 한 사회가 자유를 옹호할 뿐 아니라 자유 의식을 유지하려면, 두 가지 점이 고려될 것을 시사한다. 첫째, 사람들이 동일한 국가의 ‘시민’으로 있으려면 일정 정도의 평등이 필수적이고 이를 뒷받침할 분배 정의의 원칙이 필요하다. 테일러가 높은 계층의 소득을 줄이기보다 낮은 계층의 지위를 상승시키자는 일종의 최대 전략을 주창하면서도 보편 공여를 옹호하는 이유가 그것의 경제적 효과보다는 평등한 시민권 개념에 미칠 영향 때문이었다. 둘째, 공동 숙의와 관련된 제도들을 유지하려면 경제적 기여(의 균형)보다 상호적 부채(의 균형)를 고려하는 것이 훨씬 더 평등의 정신과 어울린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자유주의의 주된 문제가 재분배 관련한 실질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면, 발전 개념에 자유를 접목시키고 자유에 역량을 포함시킬 때,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 자유를 개인의 역량과 직결시킨 테일러는 역량은 태어날 때 온전히 갖춘 것이 아니며, 역량의 증진을 위해 사회에의 소속이 필수라고 주장한다. 역량이 타인들의 기여로 성숙되는 것이라면,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권리는 무조건적이고, 사회에의 귀속의 의무는 조건적이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그러나 과연 한 사회가 자유를 유지하면서 최소한의 분배 정의를 구현할 일관된 기준은 존재하는가?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적 자유를 주장하는 이유는 일차로 시장이 소극적 자유를 확보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적’ 등의 수사를 붙여 자유주의의 외연을 확대한다면 사민 체제와 차별성이 흐려지기 쉽다. 자유주의와 사민주의가 논리적으로 엮일 수 없다면, 과연 자유주의는 사회 정의, 복지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사회 정의 실현의 도구로서 복지 국가가 기반해야 하는 개념들, 필요, 욕구, 업적 등의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필요는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 필요란 것이 존재하는가? 객관적 필요가 인정되더라도, 희소 자원 맥락에서 상충하는 필요들 간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규범적 원칙은 가능한가? 일반적 원칙의 부재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복지 관료의 자의적 재량, 판단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국가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조세 등을 통해 빈민을 구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개인적 차원의 자선과 이타주의에 의존함으로 재산권 침해라는 비판을 피해야 하는가? 의존 문화의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가? 사회 정의는 법의 지배 사상과 양립할 수 있는가? 문제들이 첩첩산중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분배 정의를 위한 단일의 원칙군을 찾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평등 원칙과 기여 원칙이 대립하고, 한 모델 안에서조차, 다양한 정도의 상호 개입이 다양한 정도의 상호 의무를 낳는다. 분배 정의에 관한 수학적 증명이나 도식주의적 환원이란 존재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판단해줄 결정적 준거란 없다. 테일러가 단일의 배타적 원칙을 채택하는 사람은 “오직 정의의 일부만을 말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했던 맥락이다. 특정 사회에서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판단하는 일은, 역사, 경제, 통합 정도에 비춘, 그 사회에 적합한 가중치와 관련된, 상호적으로 비환원적 원칙들을 결합하는 문제를 동반한다. 적극적 자유의 적극적 옹호자인 테일러는 소극적 자유는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으며 전자가 마땅히 후자를 안고 가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둘 다를 요구하지만, 그럴수록 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불가피해진다. 지적 혼돈의 상황이 지속될수록 좌절과 분노는 증대되고 합리적 담론이 형성될 가능성은 멀어질 것이다. 진정 필요한 것은 상대 진영을 향한 분노를 자신의 사회 전망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쪽으로 돌리는 일이다. 테일러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이유도, 인간과 삶은 복잡하되 오히려 그런 복잡성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희망의 지평을 회복하는 일은 각각의 입장에 대한 엄정하고 정밀한 조사를 통해 먼저 피차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거니와, 테일러는 철학적 논의가 기여할 지점이 바로 이곳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여는 단초는 복원 작업(work of retrieval)을 통해 과거의 풍요한 자원—특히 정치적으론 주류 자유주의 안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된 두 측면, 즉 권리 담론으로 인해 빛이 가려진 공화주의 전통과 시장경제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나 그로 인해 그 의의가 적절히 조명되지 못했던 공론장의 역할—을 끌어오는 것이다. 눈앞의 차이와 대립을 넘어 존재론적 탐구와 철학적 인류학으로 명명된 역사적 고찰을 주목했던 테일러는 고전 자유주의 장점을 충분히 인지하는 내부 비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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