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란 무엇인가? - 《우화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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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란 무엇인가? - 《우화의 철학》
  • 김태환 서울대학교·독문학
  • 승인 2023.02.0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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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우화의 철학: 이솝우화의 물음을 따라 생각하기』 (김태환 지음, 국수, 224쪽, 2023.01)

 

이번 저서 《우화의 철학》(국수)은 2016년의 저서 《우화의 서사학》(문학과지성사)에 이은 이솝우화 깊이 읽기 작업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이 책은 이솝우화 20편을 한 편 한 편 세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한 20편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와 연관성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해석한 우화까지 포함하면 총 56편의 우화가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왜 이솝우화를 읽는가? 왜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은 이솝우화를 ‘깊이’ 읽으려 하는가? 

우화는 삶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서사 장르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우화 속의 스토리(이야기되는 사건)는 일정한 교훈에 대한 예시, 혹은 이를 표현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스토리는 교훈으로, 우화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솝우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스토리를 매개로 전달되는 교훈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스토리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내가 시도하는 이솝우화 깊이 읽기는 이솝우화를 교훈 이전의 스토리 자체로서 읽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토끼와 거북이>라는 우화는 잘 알려진 것처럼 끈질긴 의지와 성실함이 타고난 재능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즉 토끼에 대한 거북이의 승리라는 스토리는 바로 이러한 교훈을 표현하는 상징적 기호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스토리 자체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명백해 보이는 우화의 교훈과 스토리 사이의 상징적 관계에도 어떤 균열과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거북이는 끈질긴 노력 덕택에 승리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이 승리를 가져온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외에 많은 우연적인 정황이 거북이의 승리를 도왔다. 토끼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만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래도 토끼가 너무 깊이 잠들지만 않았다면 거북이가 경주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토리 자체의 논리만을 따지고 보면, 거북이의 승리는 많은 우연의 중첩을 통해 얻어진 지극히 비개연적인 결과이며, 두 번 다시 반복되기 어려운 극적인 사건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좋은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엄청난 노력도 모두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결론은 우화가 애초에 환기한 교훈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이처럼 교훈과 스토리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것은 스토리가 어떤 추상적 교훈 속에 남김없이 포섭되지 않는 다양한 구체적 세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훈의 관점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세부에 주목하는 순간, 명시적 교훈을 넘어서는 깊이 읽기의 가능성, 우화의 심층적 의미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깊이 읽기가 어떤 것인지는 이를테면 《우화의 철학》에서 다룬 <말과 당나귀>라는 우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말과 당나귀에 짐을 나누어 싣고 가는데, 길에서 당나귀가 힘겨워하면서 말에게 짐을 일부 덜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말은 차갑게 거절한다. 당나귀가 무거운 짐을 못 이기고 숨을 거두자, 말은 당나귀가 지던 짐마저 모두 짊어져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우화는 작은 짐을 더 지지 않으려고 남의 고통 앞에서 매정하게 굴다가 결국 스스로 더 큰 고통을 감당하게 되어 후회하는 말의 한탄으로 끝난다. 이는 여유가 있을 때 약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결국은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교훈에 정말 완벽하게 들어맞는 스토리이고, 고대의 주석가들도 이 우화에서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면 둘 다 목숨을 보존하게 된다”는 교훈을 읽어냈다. 

우화는 그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말과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고, 우화의 교훈도 이 둘 사이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그러나 이 우화에 두 동물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말과 당나귀 외에도 이들에게 짐을 나누어 실은 사람이 있다. 사람은 이 모든 사태가 시작된 원인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기이하게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그는 우화의 핵심 교훈과 관련하여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배후에 머물러 있는 스토리의 세부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야기 배경 속의 세부에 돋보기를 들이대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짐을 놓고 말과 당나귀가 직접 협상을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은 애초에 짐의 분배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잘못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는 곧 두 동물의 주인인 사람인 것이다. 우화가 주인의 책임을 배경 속에 묻어버렸기에 짐을 더 받아주려는 말의 선의 혹은 현명함만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상황에 대한 시야를 넓혀서 주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게임으로 생각한다면 우화는 시스템 속 개인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자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부리는 동물의 상태를 잘 살피지 않고 짐을 배분함으로써 결국 당나귀를 무리하게 혹사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당나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짐을 덜어주지 않은 말에게 돌린다면 말이 결국 당나귀의 짐까지 떠안게 된 것은 이기적인 매정함에 대한 정당한 징벌로 나타나겠지만, 사람의 책임 문제를 중시한다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당나귀에게 무리한 짐을 지운 주인의 무신경한 처사가 말을 상대로 해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말의 생명도 위태로울 것이며, 무모한 주인은 두 짐승을 모두 잃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하여 《우화의 철학》에서 <말과 당나귀>라는 우화를 욕심 많지만 서투른 지배자, 그리하여 피지배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면서 스스로도 곤경에 빠지는 지배자의 이야기로 읽어보았다. 물론 그러한 독해는 우화를 지은 작가의 의도에도 반하는 것일지 모른다. 작가는 말과 당나귀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의 관계에서 교훈을 끌어내려고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말과 당나귀의 주인은 우화의 맥락에서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못한 엑스트라와 같이 취급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화의 작가는 주인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작가는 주인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스토리 속에서 주인은 하나의 세부로서 보존되었다. 스토리가 구체적인 사건의 재현인 한에서 주인의 존재를 완전히 소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존된 세부 속에는 말의 이기심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의 복합적인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 그것을 펼쳐내어 무모하고 어리석으며 욕심만 많은 지배자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내가 이솝우화 깊이 읽기라고 부른 작업의 한 예이다. 

이러한 읽기는 당연히 이솝우화에만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설 비평이 그러한 작업을 수행한다. 다만 그러한 읽기의 효과가 가장 강력한 빛을 발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한 스토리 속에서 최대한 복잡하고 섬세한 인식을 끌어낼 수 있을 때일 것이다. 내게 이솝우화의 단순한 스토리 속에 포획된 현실의 복합적 양상을 풀어내는 작업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화라는 장르가 특히 그러하지만, 스토리는 늘 어떤 교훈, 어떤 주관적 이념을 설파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스토리는 그러한 고정된 의미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세부와 불일치와 균열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가 스토리 속에서 늘 새로운 잠재적 의미를 길어낼 수 있는 이유이다. 《우화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스토리의 매력에 관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태환 서울대학교·독문학

서울대학교 사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독문학과에서 카프카와 소설이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대학교에서 그레마스 기호학에 관한 연구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우화의 철학』(2022),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2020), 『우화의 서사학』(2016), 『미로의 구조』(2008), 『문학의 질서』(2007), 『푸른 장미를 찾아서』(2001)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한병철의 『피로사회』(2012) 페터 V. 지마의 『모던/포스트모던』(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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