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자살』, 좌파와 우파 모두의 미움을 받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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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살』, 좌파와 우파 모두의 미움을 받는 책
  • 이선우 성신여자대학교·프랑스 문화
  • 승인 2023.01.0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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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에필로그_ 『프랑스의 자살: 68혁명 이후 프랑스는 어떻게 자멸에 이르렀나』 (에릭 제무르 지음, 이선우 옮김, 틈새책방, 788쪽, 2022.12)

 

한국에서 ‘극우’라는 말은 많은 경우 부정적이고 때로는 불쾌한 감정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미디어에 극우 보수로 소개되어 온 집단들의 혐오 발언과 행태를 떠올리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극우에게서는 일관된 논리나 가치 체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극우에 대한 반감과 불신은 국경을 넘어 확장된다. 작년 프랑스 대선에서 르펜과 더불어 극우 진영으로 출사표를 던진 에릭 제무르(Eric Zemmour) 역시 프랑스는 물론이고 한국 좌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는 대표적인 극우 인사이다. 텔레비전 뉴스에 출연하여 무슬림 이민자를 향한 욕설에 가까운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제무르의 혐오를 혐오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의 자살』에 대한 검토를 부탁받고 읽어 보기 전까지만 해도 역자 또한 제무르가 한국의 극우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믿었으며 논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빠르게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사실에 약간의 의문은 남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제무르를 지지하는 대중의 반응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자살』은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혐오주의자라는 제무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깊은 고민과 진정성을 담고 있다. 아마 제무르라는 인물을 몰랐거나 이름을 가린 채 이 책을 읽었다면 번역 과정 내내 내적 갈등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자살』에서 제무르는 철저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20세기 후반의 역사, 법, 경제, 문화 등 프랑스 사회를 구성하는 전방위적 영역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다. 그의 논의는 매우 일관되며 명확하다. 제무르는 자신이 그토록 찬양하는 드골처럼 ‘프랑스’를 최고의 가치에 둔다.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그는 68혁명을 주도하고 그 이후의 프랑스 사회를 이끌어 온 68세대 좌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선언한다. 비판의 근거는 분명하다. 좌파가 프랑스의 이익과 프랑스의 힘을 포기하고, 세계화와 보편주의 논리를 우선시함으로써 프랑스를 약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 프랑스 사회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좌파는 물론이고, 정체성을 잃고 개인적 안위를 위해 미온적인 대처를 해 온 우파가 프랑스적 가치를 해체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과정에서 제무르가 가장 우려하는 지점은 바로 무슬림 이민자 문제이다. 다문화주의, 다양성, PC적 사고라는 좌파적 가치 아래에서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의 유입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의 동질성과 정체성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단편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제무르의 논의는 단순한 외국인 혐오나 인종주의와는 결이 다르다. 오래 전부터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적인 삶에 동화된 타 지역 출신 이민자들은 제무르의 공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슬림 이민자들의 경우에는 프랑스 문화에 자연스럽게 섞이기 어렵다. 이들을 받아들이는 프랑스 정부의 기조였던 ‘통합’에 반대하며 제무르는 지속적으로 ‘동화’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제무르가 보기에,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외국인의 문화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통합은 국가적 정체성을 허약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따라서 제무르가 허용할 수 있는 이민자의 모습은 자신의 뿌리를 버리고 철저하게 프랑스에 동화된 경우만 해당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슬람과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무슬림에게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시스템이며, 교리적 엄격함이나 원리주의적 실천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프랑스적 삶에 동화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가톨릭 신도의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무종교를 표방하는 청년들이 많아지는 오늘날의 프랑스에서 이슬람교만이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이는 유일한 종교이다. 제무르는 프랑스의 이러한 이슬람화를 통탄하며 이민자 문제에 있어서의 실패를 인정한다.  

이민자 문제가 가장 크게 이슈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에 대한 제무르의 진단에서는 경제적 측면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제무르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우파의 논의와는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다. 특히, 프랑스 내 경제 양극화를 우려하며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초래한 부작용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좌파들이 찬양하는 미국화와 세계화로 인해서 프랑스의 평범한 서민 계층이 소외되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서민 계층은 부르주아 청년들과 이민자 청년들 사이에 낀 채 소외되고 결국 좌파가 자신들을 배신했음을 깨닫고는 극우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분석이 제무르의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하는 중이다. 작년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에서 르펜은 40%가 넘는 지지율을 얻었다. 대중이 좌파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낄수록 필연적으로 우경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한국 또한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언급한 주제들을 포함하여 『프랑스의 자살』에서 제무르가 다룬 사회적 변화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지만 그 본질의 성격은 프랑스를 넘어 확장될 여지가 충분하다. 제무르의 안내를 따라 프랑스의 20세기 후반을 추적하다 보면 한국의 현재와 겹쳐지거나 한국의 미래를 우려하게 만드는 지점들을 상당히 많이 발견하게 된다. 물론, 제무르의 논리는 당연히 완벽하지 않으며 시대착오적으로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 국경의 의미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요즘 세상에서 프랑스만의 독립성, 옛 국제적 명성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한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향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반문할 수 있다. 또한, 페미니즘이나 젠더 문제에 있어서는 빈약한 근거에 대해 비판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에 있어서는 감탄할 정도의 일관성과 타당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념적 진영과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내용들이 많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우파와 좌파 모두가 이 책을 싫어하리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사실, 『프랑스의 자살』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는 번역기로 돌린 이해하기 힘든 조악한 버전(그마저도 일부가 누락된)이 이미 유포되고 있으며, 몇 년 전부터 특정 종교 집단에서는 제무르의 반이슬람 관련 논의만 선택적으로 발췌해서는 신도들을 선동해 오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정식 번역은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들에게, ‘제무르는 무조건적인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프랑스인으로서의 민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제무르는 유대인이지만 유대교를 설파하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 공화국의 비종교성을 우선시한다.’고 알려준다면 과연 좋아할까? 또한, 친미(親美)를 주창하고 화물 연대를 비난하는 극우들에게 ‘프랑스 극우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경계하고, 프롤레타리아를 걱정한다.’고 설명하면 과연 환영할까? 위안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일본 천황에게 고개 숙이는 소위 애국보수들에게 ‘프랑스 극우는 자국의 이익과 명예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당신들이 만들어 온 극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까? 즉, 제무르의 책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기를 가장 원하는 것은 우파와 보수의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 채 편의에 맞춰 선택적으로 논의를 유통시켜 온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단단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제무르 주장의 핵심은 한국 극우가 오늘날 보여주는 행태와는 정반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우파에게 이용될 논리를 굳이 소개하는 짓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항의는 번역 작업 중에도 출간된 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이 책이 과연 우파에게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19세기도 아니고, 한국 독재 정권 시기도 아닌데 ‘금서’ 취급하며 숨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미 우파가 힘을 얻은 상황에서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우파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으니 끝까지 눈 감고 귀 막으며 무시한다고 해서 우파가 세력을 잃고 좌파가 갑자기 반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탄하고 비아냥거릴 것이 아니라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이다. 위험한 논의를 수입했다고 욕하기 보다는 실체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반박하고 때로는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이 책을 타산지석으로 삼든 반면교사로 삼든 그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극우의 책이라고 반기다가 ‘옮긴이의 말’만 읽고는 화를 내거나, 좌파가 번역해서 오염되었다고 비난하는 우파는 봤다. 책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저자 이름만 보고는 어떻게 이런 책을 번역할 수 있느냐며 역자에게 실망했다는 좌파도 봤다. 이 책을 비난하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정작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알맹이 없는 공허한 비난만이 들려온다.

『프랑스의 자살』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시의적절한 텍스트다. 일종의 강박처럼 스스로를 좌파 또는 우파로 단정지은 이들에게는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주리라 확신한다. 더 나아가, 진정한 민족주의란 무엇인지, 대한민국은 어떤 청사진을 그려야 하는지, 우리의 공동체에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좌파나 우파라는 이름표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정립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자살』은 유용한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이선우 성신여자대학교·프랑스 문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영화 이론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8년 동안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영화를 바탕으로 프랑스 문화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연구를 꾸준히 발표해 왔다. 지금은 성신여자대학교 프랑스어문·문화학과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20세기 프랑스 및 프랑스어권 문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로 읽는 프랑스 문화』(202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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