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데리다와 함께 나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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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데리다와 함께 나아가기
  • 강선형 서강대·철학
  • 승인 2023.01.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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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자크 데리다』 (강선형 지음, 컴북스캠퍼스, 126쪽, 2022.12)

 

<자크 데리다>(컴북스캠퍼스, 2022)는 우리에게 ‘해체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데리다의 삶을 소개하고, 해체, 음성중심주의, 차연, 대리 보충, 타자, 유령, 환대, 애도, 용서,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열 개의 키워드를 통해 그의 철학에 접근해보는 책이다. 데리다의 철학에 다가감에 있어서 그의 삶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삶 속에서 겪었던 무수한 절망들이 어떻게 그의 철학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는지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리다의 삶과 철학에 대해 알게 될수록 우리는 세계를 살아가며 겪는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그와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라는 사람

데리다의 삶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 ‘자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데리다에게는 물론 유대식 이름인 엘리(Elie)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그의 부모가 처음 그에게 지어준 이름은 영어식 이름인 자키(Jackie)였다. 알제리의 유대계 프랑스인인 데리다에게 붙여진 이름이 자키라는 것은 데리다가 태어난 당시 알제리의 분위기를 잘 알려준다. 많은 유대인이 그랬듯이 데리다의 가족들도 유럽에서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알제리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만큼 그들에게 유대교적인 전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 이후에 그들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프랑스식으로 변하였는데, 프랑스식 삶을 영위한다는 것 자체가 알제리에서 부르주아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가족뿐만 아니라 대체로 당시 알제리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식 삶을 영위하면서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프랑스 본토보다 더 넓게 퍼진 미국 매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데리다의 이름이 ‘자키’가 된 것도 그러한 영향 아래에서다. 데리다는 훗날 이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바꾸어 표기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자크(Jacques)’가 그것이다. 아랍식도, 프랑스식도, 유대식도 아닌 데리다의 이름 ‘자키’와, 그의 새로운 이름 ‘자크’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배경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알제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데리다는 유대인 정원 제한 조치로 인해 벤 아크눈중고등학교에서 추방되는 등 여러 배척과 분리를 경험했고, 이러한 경험은 늘 자신을 어떤 공동체 내부의 존재가 아니라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했다.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프랑스 본토로 유학을 떠났을 때도, 프랑스의 여느 지방과도 다른 알제리에서 온 유대인으로서 데리다는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배제의 감각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가 해체주의를 펼쳤을 때도 폴 드 만 사건이나 하이데거 스캔들 등 그에게 가해졌던 비판과 요구되었던 해명들을 떠올려 보면, 사람들이 그에게 바랐던 것은 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일이었다. 당신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가, 공산주의자인가, 유대인인가, 좌파인가, 이주민인가, ‘배신자’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놓아서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줄지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알제리에서부터 프랑스, 미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던 요구고, 늘 경계에 서 있는 그가 계속해서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배제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데리다의 ‘환대’ 개념은 사람들이 늘 그에게 요구했던 것인 이러한 ‘경계 짓기’에 대한 저항과 다르지 않다. 그는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늘 그에 저항했는데, 알제리 내전이 일어나고 있을 때도 프랑스에서 취한 국경 폐쇄 조치를 비판했고, 어떤 국가를 불량국가(État voyou)로 규정하고 그와의 경계를 마련하는 모든 일들에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했으며, 늘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는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획일적으로, 그리고 또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체의 경계 안과 밖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시도들에 대해서 공동체 스스로 저항할 수 있기를 바랐던 그의 시도들이었다.

 

                                                                 사진=나무위키

해체, 음성중심주의, 차연, 그리고 대리 보충

당신은 무엇에 익숙한가? 어떤 공동체의 내부에 있는가? 어떤 세계에 귀속되어 있는가? 세계의 이방인들은 데리다처럼 늘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데리다는 문화 자체가 그 문화 안에 있는 이질적인 것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늘 말한다. 그리고 데리다의 개념들은 이 ‘내부의 이질적인 것’을 밝히는 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자크 데리다>에서 첫 번째 키워드로 다루는 해체 개념은 하나의 개념 또는 체계의 유래를 추적하여 근원의 자리에서 근원적인 것의 불가능성을 발견하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 내부에서, 또 체계 내부에서 그 내부에 속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체 또는 탈구축이라고 번역되는 이 ‘déconstruction’은 단지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의 한계를 마련함으로써 오히려 그 개념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러한 해체 개념은 <자크 데리다> 두 번째 키워드인 ‘음성중심주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데리다가 서구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사유로서의 로고스가 직접적인 목소리와 관계를 맺고 있고, 그것의 재현인 문자를 파생적인 것으로 배제해 왔다는 데 있다. 서구 형이상학의 근원적인 자리에서 이러한 ‘음성중심주의’가 그 어떤 불투명성도 없이 ‘현재에’ 그 자신이 말한 것을 알아듣는다는 방식으로, 목소리와 현재라는 시간에 부당한 특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라는 시간은 왜 특권적이어서는 안 되는가? 이는 세 번째 키워드인 ‘차연’으로부터 해명된다. 차연은 라틴어 ‘differre’에서 온 프랑스어 ‘différer’가 ‘다르다’, ‘차이난다’라는 뜻과 ‘지연시키다’, ‘연기하다’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탄생한 용어이다. 데리다는 차이(différence)라는 개념에서 ‘e’를 ‘a’로 바꾸어 자신의 이 고유한 개념을 ‘différance’라고 표현한다. 동일하게 ‘디페랑스’라고 발음되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어도 ‘차이’나 ‘차이(差移)’ 등이 채택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연으로서의 차연의 시간성을 고려할 때, 현재라는 시간에 부여된 특권은 자연히 박탈된다. 차연은 현재로 주어진 적이 없으며 주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현재 이전의 기원적인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기가 소유한 기억을 되찾듯이 그것을 되찾을 수 없다.

이는 차연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네 번째 키워드, 대리 보충을 이야기하면 더 잘 알 수 있다. 자연적인 음성 언어의 결함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의 바깥에서 ‘외부적으로 첨가’되는 것인데, 이 문자 언어가 대리하고 보충하는 한에서만 음성 언어는 성립한다. 문자 언어는 목소리의 바깥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것을 대리하고 보충한다.


타자, 유령, 환대, 애도, 용서, 그리고 도래할 민주주의

데리다의 타자 개념, 그리고 그의 타자론인 유령론(hantologie),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환대와, 애도, 용서는 모두 이 이질적인 것에 대한 사유와 관련되어 있다. 지연이라는 차연의 시간성이 과거에 일어났어야 했던 것이 지금 일어났다는 방식으로는 사유될 수 없는 것처럼, 타자는 끊임없이 현재화하고자 하는 우리 의식의 구조 안에서는 사유될 수 없는 자이다. 그런데 사유될 수 없는 것은 현재화의 방식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유일한 방법이자 불가능한 방법인 것이다. 이것이 계속해서 지연되는, 또는 계속해서 대리 보충되는 것을 우리 의식에 포섭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으로 남겨두어야 하고 남겨둘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있기를 그치지 않는 자에 대해 그쳐질 수 없는 환대, 완결될 수 없는 애도, 종결될 수 있는 용서를 말한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키워드인 도래할 민주주의 역시 그러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도래 중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약속의 형태로 사유한다는 것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어떤 현실화될 수 있는 환대로도 환원될 수 없는 환대를 함축하며, 이러한 환대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만 모든 현실화된 민주주의 역시 가능하다. 계산되고 한계 지어지는 도덕이나 정치, 법적인 토대 자체를 재고찰하고 재해석되도록 강제하는 것이 바로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고, 도래할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것이 정의라면, 우리가 마주한 어떤 환대도, 어떤 애도도, 어떤 용서도, 어떤 민주주의도 불충분한 구현이라면, 이 끝나지 않음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또 우리의 타자들이 현실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배제와 폭력들을 늘 새롭게 다시 사유하게 해주지 않는가? 데리다는 우리가 항상 용서받아야 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늘 충분히 환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용서가 가진 하나의 아포리아다. 그런데 그 모든 불충분성이 반복되는 세계 속의 실망들과 절망들로부터 우리를 나아가게 만든다. 바로 그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의 철학과 함께 세계를 살아가며 우리가 모두 겪는 반복되는 폭력과 실망, 절망 속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강선형 서강대·철학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들뢰즈 철학에서 시간의 종합과 영화』로 석사 학위를, 『들뢰즈와 칸트: 들뢰즈 철학의 형성에서 칸트 삼비판서의 역할』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프랑스철학회 총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출판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논문으로는 「칸트와 들뢰즈에서 자아의 동일성 문제」, 「랑시에르의 시간과 영화, 그리고 정치」, 「아감벤의 잠재성과 무위」, 「영화의 사운드와 자유간접적 역량」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자아의 초월성』(공역), 『니체, 버스킹을 하다』, 『철학극장: 철학과 영화의 마주침』, 『자크 데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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