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의 정치와 사상…한국다운 문명의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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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의 정치와 사상…한국다운 문명의 창조
  • 김영수 영남대학교·한국정치사상
  • 승인 2022.12.2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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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세종대의 정치와 사상: 문명교류와 국가혁신의 정치사상사』 (김영수 지음, 도서출판포럼, 528쪽, 2022.11)

 

이 책은 세종대의 정치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세종대의 경이적인 업적을 특히 문명교류와 국가혁신의 관점에서 검토했다. 세종대는 20세기와 함께 한국 역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대였다. 율곡은 세종이 “우리나라 만년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세종은 국가 전체에 걸쳐 비상한 ‘혁신’을 추진했고, 그 결과 국가의 모든 분야에서 ‘문명표준(standard of civilization)’을 확립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적인 것’으로 알려진 것의 원형이 되었다.

세종대에 관한 연구에는 세 가지 편향이 존재한다. 첫째, 일국적 관점이다. 한국의 시야에서만 이해하려는 것이다. 둘째, 민족적 관점이다. 과도하게 미화하려는 것이다. 셋째, 문화적 관점이다. 정치보다 문화적 이해에 치우친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책은 세계사, 비교사, 정치사의 관점을 취했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종대의 업적은 13~14세기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의 ‘제1차 세계화’(the first globalization)에 의존하고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결과 유럽과 아랍, 중앙아시아, 중국문명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융합되었다. 13세기 중엽 수많은 고려인이 세계체험을 겪었다. 그 결과 국가혁신의 사상과 운동이 배태되어, 조선건국으로 귀결되었다. 세종은 고려에 유입된 자양분을 소화하여, 전면적이고 종합적인 국가혁신을 추진했다. 세종에 앞서 혁신의 틀을 1차적으로 종합한 것은 정도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정치 부문에 한정되었다.

세종대의 혁신에 지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원(元에) 전해진 송대의 성리학이었다. 오늘날 성리학은 낡고 진부한 형이상학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가장 혁신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이었다. 성리학이 고대 이래 중국인을 사로잡아 온 신비주의와의 지적 투쟁 끝에 성취한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에는 신처럼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주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와 자연, 인간의 제1운동인은 궁극적 원리로서의 천리(天理)일 뿐이다. 이 원리는 또한 신비체험이 아니라 격물치지라는 이성적 탐구에 의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제 세계는 ‘경외(worship)’가 아닌 ‘이해(understanding)’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일단 이런 인식론적 변혁이 일어나자, 세계관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과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체계화와 종합화가 시도되었다. 성리학은 위대한 ‘이성의 시대’를 이끄는 이념이자 좌표였다. 이런 자각이 송(宋에)서 원으로 전해지고, 다시 고려까지 도달했다. 1290년, 안향은 중국에서 주자의 책과 초상화를 가지고 귀국했다. 주자 사후 거의 1세기 만이었다. 그리고 14세기 중반 이후 성리학이 고려 사회의 정신적‧정치적 변혁의 동인으로 부상했다.

한반도인이 성리학을 비롯해 당대 동아시아의 문명표준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것은 몽골제국의 지배하에서였다. 몽골제국은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 제국을 통일했다. 세계국가는 일종의 전도매체로서, 모든 것을 섞이고 교류하게 만든다. 몽골제국은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을 융합했다. 또한 유럽과 아랍,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문명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장을 제공했다. 다양한 문명들은 스스로를 쇄신하고, 한편 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문명을 창조했다. 당시 몽골제국, 특히 수도 대도(大都, 북경)는 문명 융합의 커다란 실험장이었다. 13~14세기의 한반도는 몽골제국의 강력한 지배하에 있었고, 고려는 세계 제국의 일원으로서 그 핵심부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원에 전달된 송의 문명적 혁신이 팍스 몽골리카 하에서 고려로 유입되고, 그것이 한반도의 문명을 혁신한 것이다. 

15세기 조선에서는 이런 연결이 많이 취약해졌다. 14세기 중엽 팍스 몽골리카가 붕괴되자 그 연결망도 급속히 쇠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의 한국사와 비교하면 그 연결망은 여전히 강력했다. 한반도의 15세기는 13~14세기의 글로벌한 문명교류에 강력한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 고려는 조선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주었다. 가장 중요한 유산은 몽골제국으로부터 유입된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그 유산은 문화만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 유산 없이 세종대의 혁신은 불가능했다. 세종대의 눈부신 혁신을 민족적 우수성의 산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이다. 15세기의 조선은 시공간적으로 세계에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사의 흐름과 직접 연계되어 있었다. 특히 송, 원, 명으로 이어진 문명 혁신 위에 서 있었다. 조선건국과 세종대의 국가혁신은 팍스 몽골리카 아래서 창조된 문명적 변혁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혁신을 이끈 세종과 그 문신 관인들은 음악뿐 아니라 모든 분야를 원리적으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다른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수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융합할 수 있었다. 고유문명과 세계문명을 융합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것은 한국 역사상 세종대가 처음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표준이 완성되고, 조선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전통의 오리진이다.

그런데 32년간에 걸친 세종의 정치는 하나의 목적, 즉 백성을 하늘이 낳은 사람(天民)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섬기고 보살피는 것이었다. 위민국가의 이념은 정도전이 제시한 것이다. 이성계는 그것을 조선의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여, 1392년 즉위교서에서 공식 선언하였다. 세종은 정치의 도리(王道)를 이렇게 말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백성의 임금이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어루만질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였다.”(『세종실록』 05/07/03)

 

세종의 정치적 특징은 첫째, 근본적으로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학문관은 심학적(心學的)인 유교와 대립했다. 사림정치의 원조인 조광조는 “‘도’야말로 정치의 출발점”(道乃出治之由)이라고 주장했다. 세종 10년, 변계량이 “문사(文士)를 취하는 것은 오로지 학문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자, 세종은 “선비를 취하는 목적은 세용(世用)에 있는 것이다. 어찌 학문만 위함이라 하겠는가.”(『세종실록』 10/11/01)라고 반박했다. 또한 세종이 집현전에서 『사기(史記)』를 읽으려 하자, 윤회는 “경학(經學)이 우선이고, 사학(史學)은 그다음”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세종은 문신들이 역사서를 잘 모르고, “말로는 경학을 한다고 하나,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르게[窮理正心] 한 인사가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세종실록』 07/11/29)고 비판하였다. 세종은 산학(算學,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수학이 천문학, 토지 측량(量田), 세무 행정 등 국가의 모든 사무에 긴요한 지식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둘째, 세종은 듣기와 포용에 뛰어났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것이라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 과감히 수용했다. 세종 12년과 15년, 헌릉(獻陵, 태종의 능)의 이장 문제로 세종은 지관(地官) 최양선의 견해를 듣고자 하였다. 그러자 예조좌참판 권도는 국가의 안정은 이런 잡술이 아니라, “육경(六經)을 높이시고 백가를 물리쳐서, 마음과 학술을 바르게 하고 간사함과 정대함을 분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세종실록」 15/07/15) 권도의 입장은 성리학의 세계관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임금은 포용하는 것으로 아량을 삼는 것이다. 비록 꼴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또한 반드시 들어 보아서 말한 바가 옳으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비록 맞지 않아도 또한 죄주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아래의 사정을 얻어 알고 자신의 총명을 넓히는 것이다.”(『세종실록』 15/07/27)라고 말했다.

셋째, 세종은 중국을 무조건 표준으로 맹종하지 않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표준을 재창조하고자 했다. 수준 높은 중국 음운학을 궁구하여, 한국어에 적합한 문자로서 훈민정음을 만든 게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중국을 완전한 표준으로 인식한 최만리 등 문신들은 세종이 중화문명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그것은 예외적 견해가 아니라 당대 지식인들의 보편적 입장이었다. 또한 조선식 농법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면서 세종은 중국과 한국은 “풍토가 다르다(風土不同)”는 이유를 들었다. 당시 동아시아 농법의 기본 텍스트는 원대에 편찬된 『농상집요(農桑輯要)』로서, 중국 황하 이북의 풍토에 적합한 농법이었다. 이런 ‘풍토’의 문제는 단지 농법에 그친 것이 아니다. 첫째 말이 다르고, 둘째, 소리가 다르고, 셋째, 산천이 다르고, 넷째, 하늘이 다르고, 다섯째, 수목이 다르고, 다섯째, 관습이 다르고 수많은 것이 달랐다. 이 때문에 새로운 문자, 음악, 회화, 천문학, 의학, 법률 등이 필요했다. 

물론 세종 시대에도 굶어 죽고, 옥에 갇혀 원통하게 죽는 사람이 있었다. 세종도 “천재지변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천재지변에 대한 “배포와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나의 생각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다해 다스린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으로 안다.”고 역설했다. 정치가 인간의 고통에 완전히 대처할 수 없지만, 덜 고통스럽게 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힘의 정치(power politics)’에 대비되는 ‘정치의 힘(power of politics)’이다. 세종의 정치는 단순한 정치적 의무를 넘어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베버가 말한 “하늘의 부름에 답하는 정치(politics as a vocation)”에 가깝다. 또한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버의 이상적 정치가상에 가깝다.

조선 정치체제는 고려의 불교적 세계관에 반대하고 성리학을 정신과 정치의 모범으로 삼아 탄생한 체제였다.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는 정치가 아닌 초월에 의해 인간의 삶을 구원하려는 시도이다. 불교의 ‘출가(出家)’란 정확히 정치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이다. 즉, 출가란 인간의 삶에 나타난 근본적 분열이었다. 이 사유는 1,000년 동안 한국인의 삶과 사유를 지배했다. 그러나 15세기의 조선인들은 이 세계를 천리(天理)의 개념에 의해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주자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제시되고 있는 ‘복성(復性)의 정치’, 그리고 그 방법론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그것이다. 

정몽주는 그것을 ‘일용평상의 도’로 불렀다. 출가를 통해 초월적으로 체득하는 진리가 아니라, 밥 먹고 잠자는 일처럼 매일의 일상에서 알고 행하는 진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우리 유교는 하나요 불교는 둘이며, 우리 유교는 연속되어 있고 불교는 단절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낙관적 사유는 조선의 탄생으로부터 늘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다. 조선건국에 즈음하여, 정몽주의 ‘인륜성’과 정도전의 ‘위민론’이 충돌한 것이 원형적 대립이다. 이 대립은 우연이라기보다 인간의 삶에 내재된 본질이다. 즉,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은 행위(praxis) 속에서 항상적으로 분열의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세종은 일생에 걸쳐 두 삶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즉, 조선 성리학이 탄생시킨 성공적인 정치적 사례이자, 성공적인 인간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세종은 유교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삶의 모범에 가까이 갔다. 그래서 율곡은 선조에게 “우리 세종대왕은 동방의 성주(聖主)”라고 칭송했다. 세종의 사상과 행동은 조선왕조를 넘어 인간적 삶의 보편적 ‘불멸성(immortality)’을 창조했다.


김영수 영남대학교·한국정치사상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영남대학교 정치행정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 『건국의 정치: 여말선초, 혁명과 문명전환』(이학사, 2006)은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6), 제32회 월봉저작상(2007)을 수상했다. 공저로 『정치학의 대상과 방법』, 『한국정치사상』, 『세종리더십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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