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이후를 상상하는, 방법으로서의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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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이후를 상상하는, 방법으로서의 ‘감정’
  • 도서출판 갈무리
  • 승인 2022.12.1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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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읽기_ 『광장과 젠더: 집합감정의 행방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상』 (소영현 지음 | 갈무리 | 2022. 11. | 464쪽)

 

이 책은 광장을 구축하는 자리마다 작동해온 한국사회의 통치술을 ‘감정’이라는 렌즈를 통해 톺아본다. 광장의 계급적·젠더적 탈구축을 시도하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즉 포스트 민주화 시대로의 이행 가능성을 모색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 등장하는 비인간들 ― 외계인, 유령, 시체, 로봇, 게임 캐릭터, 좀비 등 ― 은 타자의 얼굴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에 생존을 위협받는 현실의 무게가 결합되어 등장한 조각난 개인 혹은 그 파편들이었다. 개인의 내적 차이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차이‘들’ 속의 보편적 지층을 마련하려는 일, 그것이 개인에 대한 사유가 현재 직면한 가장 중요한 난제인 것이다. 권력과 돈의 기이한 결합이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애도되지 못한 사회적 공분과 그것을 동력 삼아 유지되는 ‘열폭’ 사회에서, 부끄러움의 회복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감수성 회복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분의 예기치 못한 향배를 이끄는 전환적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감정연구의 부상

저자는 전작 『올빼미의 숲』(문학과지성사, 2017)에서 ‘비평의 위기’ 시대에 문학이 가진 공감의 힘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공적인 힘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사회비평’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책 『광장과 젠더』에서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감정’을 경유한 삶, 사람, 사회 읽기를 시도한다.

저자가 1부 1장 「흐르는 성찰성과 은폐된 미래」에서 서술한 것처럼 인문학계와 출판계 전반에서 최근 몇 년간 정동(affect), 감정, 느낌, 감수성 등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경향은 거시적인 접근과 미시적인 접근, 구조적인 분석과 표층적/일상적 분석이 여전히 중심-주변으로 위계화되는 이항대립적 인식론의 틀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어려우며, 더 나아가자면 근대 이후에 대한 상상이 어렵다는 차원에서, 그것 너머에 대한 접근과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융복합적 연구에 대한 요청이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학계는 현실과의 관련성을 고민하지 않으면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고사할 수밖에 없다. 학계의 감정에 대한 폭발적 관심의 증가는 사회현실에서의 요청에 대한 응답의 성격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삶과 그 조건이 바뀌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지구화와 과학기술-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일방적인 영향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고, 지구적 차원에서 상호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향이 점점 강화되면서 예측 불가능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면서 전 세계가 절감하게 되었듯,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만들어지는 지구적 차원의 재난의 상황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데, 그것이 지금까지의 방식, 국가나 민족, 지역, 이념, 정치체 등을 중심으로 한 해법으로는 문제의 중심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사회의 문제로 좁혀보면, 신자유주의 20년 이상의 시간이 축적되면서 표면적으로만 보면 세계 바깥은 없고 탈출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더 나빠지는) 한국사회에서 사회와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이론이나 인식틀은 사실 없다. 그런 까닭에 아직 무언가로 분명한 형체를 마련하지 않은 흐름들, 움직임들, 감정, 느낌, 정동, 정서, 감성에 대한 관심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뚜렷한 적대도 가시화된 적도 없는 상황에서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의미화되는 힘의 흐름들만 존재하고, 그것들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채로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결국 현실 사회가 직면해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감정, 정동 등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런 것에 대한 포착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인문학자가 떠맡아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저자가 보기에는 그간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관해서 다양한 오해가 있었다. 감정연구가 관심을 갖는 ‘감정’은 개인적인 감정이거나 문학작품이 자아내는 어떤 분위기의 의미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감정에 대한 관심은 보이거나 들리지 않지만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거나 조형하는 힘에 대한 관심이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만져지지 않았던 것들의 외화를 가능하게 할 방법론적 모색이다. 또한, 감정에 대한 관심이 학술장으로 확장되는 현상은 분화와 단절이 강화되고 있는 학술장이 사회와 접속할 수 있는 접면을 넓혀가고 있는 기미로 읽을 수 있으며, 사회와 학술장의 유의미한 소통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광장의 유동하는 힘을 추적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감정연구와 광장을 연결시킨다. 광장에서 일어난 사회적 힘의 폭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우리가 경험한 것은 혁명이었나? 연대와 공존의 느낌만은 아니었던 잉여의 감정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광장에 대한 익숙한 사고방식은 축적된 갈등과 모순이 임계점에 도달하여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광장에서 터져 나왔고, 그 힘이야말로 사회변혁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2000년대 한국사회에서 여러 차례 분출한 광장과 봉기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기존의 설명방식은 부족함을 드러낸다고 본다.

지금 이곳의 체제를 중지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자리가 광장이라면, 광장을 구성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내부의 집합감정이다. 그런데 집합감정은 균질적인 힘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들여다보면 방향성도 지향도 다른 힘들의 충돌이자 공존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광장 내부에 서로 다른 집합감정의 흐름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 사이에 권력의 차이가 존재하며, 그 권력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광장 자체의 지향이나 방향성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장에 대한 관심은 내부의 서로 다른 힘들에 대한 것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광장은 지금 여기이자 동시에 지금 여기의 다음에 오는 미래의 공간이다. 광장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허용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자리)가 보장된 곳으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자리는 처음부터 확보되지도 제대로 보장되지도 않다. 목소리를 내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고요. 권리도 권력의 위계 속에서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권리가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사실상 현실이나 사회를 구조화하고 작동시키는 힘은 실제로는 권력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런 의미로 언제나 위계화되어 있다.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위계를 모두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고 하는 체계 내부 즉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좀 더 눈을 돌려야 하고 그 구성원의 자리와 목소리를 더 많이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믿는다는 점이다. 모든 자리를 보장하는 일, 모든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일, 이것은 사실 아무런 갈등도 없거나 평화롭기만 한 상태는 아니다. 수많은 갈등이 지속될 것이지만, 그러한 갈등이 사라지는 시공간이 더 위험하다. 그러니까 광장을 채우는 ‘광장’들은 지금 현실에서는 ‘광장’이라기보다, 있지만 보이지 않거나 지워진 혹은 잊힌 골목일 수도 지하통로일 수도 있다. 

요컨대, 광장은 사회이고 현실이며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정치투쟁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이 정치적 장이라고 할 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광장에 대한 고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아니라, 수행성의 차원에 관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시켜나가는 것이라는 점, 정치체가 아니라(정치체이기도 하지만) 실천이고 운동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신자유주의로 구현된 전지구적인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것은 경제 문제와 결합한, 경제 문제로 가시화되는 정치적 문제라는 생각이다. 이런 차원에서 광장에 대한 관심은 민주주의의 열망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광장에 대한 감정연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에 따르면 광장의 시간은 떠도는 유동적 힘들이 상호적으로 전염되고 증폭되어 파동이 되는 과정이었다. 2008, 2016, 2022년의 광장이 입증하듯이 그 힘들은 때로는 예측하지 못했던 장소에 가닿기도 하였고, 내부에서 다양한 흐름들의 충돌이 있기도 했으며, 끝끝내 가시화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2016년 촛불봉기 내부의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가시화하는, 광화문 광장에 꾸려졌던 ‘페미존’을 사례로 들 수 있다.

 

미래를 상상하려면 광장 속의 다양한 흐름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광장은 다양성들로 들끓고 있다. 2008년에도, 2016년에도, 2022년에도 광장에 모인 우리들의 목소리는 단일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장의 다양체로서의 성격은 지금까지 충분히 진지하게 사고되지 못했다. 광장의 내부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개별적 흐름들이 존재할 뿐이기에, 광장을 하나의 머리, 하나의 방향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며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오히려 ‘광장’ 이후를 상상하고 만들어내려는 사람이라면, ‘광장’에서 일시적으로 출현한 듯 보이는 방향성이 아니라 각기 다르게 움직이는 다양한 힘들의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감정연구’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감정연구는 녹아내리고 흘러넘치는 힘들의 흐름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서론」에서 저자는 이러한 과정 없이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그 어떤 이해나 전망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감정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1부 「사이: 장소와 다른 장소」

저자에 따르면 감정을 통해 포착되는 것은 운동성이다. 그것은 곧 보이지 않으며 잡히지 않는 세계와 존재를 규정하고 또 변화시키는 ‘수행적’ 과정 자체이다. ‘감정’ 연구가 가닿고자 한 미래는 유동하는 힘이 만들어내는 변화와 그것이 조망하게 하는 다른 현실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책의 1부 1장에서는 그간 감정연구가 특히 한국사회에서 어떤 지도를 그리며 전개되고 있는지를 충실하게 살펴보고, 축적된 문헌자료들 속에서 저자 자신의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것들을 선별하여 비평한 뒤, 운동성, 변화, 미래에 대한 책의 논지의 근거를 마련한다.

2장과 3장에서는 미래에 대한 구상이 근대 이후를 조망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근대 초기 한국의 사례들을 비평한다. 2장에서는 김기진의 ‘프로문학’ 제창을, 실패한 사회주의 실험의 일환으로서보다는 ‘개인의 집합체’로서의 전체에 대한 관심의 확장으로 이해해본다. 3장에서는 1940년대 전후 경제불황과 전시호황을 한 몸에 겪은 비엘리트 조선인들의 부정합적 감각경험에 대해 고찰한다.

2부 「패턴: 속물사회의 발생학」

2부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광장 통치술의 계보를 추적하는 자리에서 한국전쟁 경험이 생성한 사회변동적 힘의 흐름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자 경험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포착한 키워드는 ‘속물성’이다. 한국전쟁의 경험은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유포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나’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태도는 공공적 이슈에 무심한 탈정치적 태도를 야기했으며, 죄의식과 수치심을 상실한 속물적 태도를 불러왔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이것을 계층적 위계 구조와 그 틈새를 메우는 교양이라는 알리바이, 사회의 차별화 정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속물시대의 개시란, 성찰 없는 개인이 근대적 주체 모형의 실질을 채우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속물화 경향이 양극화와 맞물려 사회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상실해갔고, 한국사회 감정구조를 관통하는 속물성은 외환위기를 통과하며 글로벌리즘 시대를 맞이한 2000년대 이후 폭발하기에 이른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3부 「연결: 감정사회의 윤리와 집합감정의 정치학」

3부에서는 한국사회에서 ‘87년 체제’ 이후 나타난 부정적 집합감정의 흐름을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집합감정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한 필수적 선결 작업이다. 감정의 행방을 통해 저자가 확인하고자 한 것은, 나와 타인 사이, 개인과 전체 사이의 틈이자 거기로부터 드러나는 본래적 관계성이다. 연결 아니 감염의 정치학의 의미에 대한 모색이 3부에서 펼쳐진다.

특히 3부에서는 〈나꼼수〉 열풍의 사회정치적 배경과 그 한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눈길을 끈다. 풍자적 유머는 경계를 유연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풍자가 자신이 유연하게 만든 경계를 새로운 틀로 대체하지 못할 때, 풍자의 유연하게 하는 힘은 다시 기성 장벽들 속으로 포섭되거나 심지어 벽을 세우는 동력으로 활용되곤 한다. 저자는 실상 〈나꼼수〉에 대한 관심의 급격한 소멸은 바로 이 지점, 즉 그것이 실정적 대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현실의 진영 논리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풍자적 비평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쓴다.

4부 「상상: 공공감과 광장의 젠더」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는 소용돌이의 시간을 지나왔으며 여전히 통과하는 중이다. 저자가 보기에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한국사회는 온통 부정적 사회감정으로 채워져 왔다. 적대, 증오, 무시, 모욕, 혐오 등의 감정이 증폭되었고, 혁명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체념과 무기력에 가닿았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으로의 개조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4부에서 저자는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문학적 개입은 그것에 대한 재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사유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참사는 가해와 피해의 구도로 납작해질 수 없으며 그렇게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 사법적 정의의 실현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참사와 같은 사건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우리 대부분은 가해와 피해의 구도에 잘 들어맞지 않는 자리, 방관이나 목격의 자리에 서 있다. 그러한 자리에서 참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에 대해서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고, 연루 속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사유하거나 성찰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시인, 소설가, 비평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개입을 시도했고, 그것이 이후에 쓰거나 읽는 자리에 깊이 영향을 드리웠다. 사실 문학이란 결국 현실의 텍스트화라는 점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문학이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개입과 함께 우회적인 개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며, 문학장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축적된 고민이 은폐된 형태의 집합감정으로 한국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다. 힘의 형태로 존재하는 집합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곳의 우리의 문제를 처음부터 반복하는 오류를 벗어나게 해준다. 

4부 1장 「차마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저자는 무시와 모욕이 횡행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문학과 인문학은 ‘차마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윤리적 성찰이 지금 이곳의 집합감정 아니 광장 연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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