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권력과 시류에 맞서 정론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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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권력과 시류에 맞서 정론을 외치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2.05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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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정의 문장들: 상언上言에서 독자 투고까지,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 김경미 지음 | 푸른역사 | 308쪽

 

조선 시대의 상언과 근대 계몽기의 여성 독자들이 쓴 독자투고를 톺아본 책이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법을 어기고 편법을 행했다고 당당하면서도 간절하게 호소한 양반 부인의 상언上言, 시집을 향해 온몸을 다해 항변한 원정原情을 보면, 유교 가부장제 사회의 강요된 부덕婦德을 지켜야 했던 여성상과는 다른 모습을 본다. 여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대궐 앞에 엎드린 부인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여성 신문 독자, “첩이 부인만 못하리까, 슬프다 대한의 천첩된 자들아”라고 외친 첩들의 목소리 역시 묻혀 있고 잊혔던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를 조선 후기와 근대 계몽기로 나눠 여성들의 글을 살핀 이 책은 인용된 글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새삼스럽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딸이 양반가 첩으로 들어가니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고 잡혀가자 사회적 비난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관의 처벌을 받을 일은 아니라고 항변한 조원서의 처가 올린 원정은 논리정연한 항변의 예이다. 

한데 이 책은 그저 단순한 발췌·인용이나 기계적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글에 얽힌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짚어 이해를 돕는 것은 적극적인 해석으로 여성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를테면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남녀동등사상을 설파한 김송재의 글을 한문판에서는 “남자에게만 맡겨 두지 아니함이 우리 여사의 의무일까 하노라” 등 여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절을 뺀 점을 지적하며 주독자층인 남성들을 의식한 듯하다고 본 대목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인용된 글들이 흥미롭다. 권력에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할 말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신선하다. 19세기 후반 우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손자 심희순의 첩이라는 기생 출신 초월이 시국의 적폐를 고발하고 개선책을 제시한 상소문은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다.

“사람됨이 특히 모자라고, 행동이 경솔하고 무례하며 가난한 선비를 능멸하고 사람들을 무시하며”, “지각이 없어 소견이 어둡고 생각이 막혀 있으니 밥 부대일 뿐”이라고 남편을 비판하며 삭탈관직해 시골에 보내 10년간 성현의 글만 읽도록 하면 좋겠다고 하니 말이다.

1899년 북촌 부인들이 주축이 된 찬양회가 축첩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고종 황제에게 “상감께서 먼저 후궁을 물리치시고 공경대부로부터 미관말직과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 절대로 첩을 두지 말라는 칙령을 내려 줍소서”라고 한 것은 또 어떤가.

근대 계몽기에 들어선 여성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순 한글로 간행한 제국신문 등 신문이 근대 여성의식이 형성되는 공론장 역할을 하면서 여성들의 독자투고도 활발해졌다. 이들은 먼저 여성 교육의 중요성에 눈 돌렸는데 1898년 “북촌의 여중군자” 몇 명은 여학교의 필요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학교설시통문〉을 내면서 “혹시라도 이목구비와 사지오관육체가 남녀가 다름이 있습니까?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가 벌어 주는 것만 앉아 먹고 평생을 깊은 규방에 처하여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라고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나아가 장경주란 이는 “우리 여자 된 동포 자매”들을 향해 일찍 교육을 받지 못해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한층 분개하라”고 당부한다. “손가락을 속박만 하는 가락지를 팔아 국채를 갚고 보면 …… 우리 여자의 이름 세상에 전파하여 남녀동등권을 찾을 것”이라는 설득을 접하면 국난을 당해선 남녀 할 것 없이 분투하던 모습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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