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삶을 회복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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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삶을 회복하기 위하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0.16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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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 평전: 경험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 사만다 로즈 힐 지음 | 전혜란 옮김 | 김만권 감수 | 혜다 | 336쪽

 

한나 아렌트는 인간과 세계에 근본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인류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스스로 사유함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세대가 겪는 문제들에 당당히 맞섰다.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계 철학사상가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온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냈다. 1941년 나치의 파리 점령 후 미국 뉴욕에 정착했고 《전체주의의 기원》 등의 저서를 펴내며 일평생 전체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한 뒤 발표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책은 ‘평전’이라는 제목으로는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출간된 책으로, 아렌트의 일대기를 자세하면서도 간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각 장에는 《그림자》,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전체주의의 기원》, 《아모르 문디》, 《과거와 미래 사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혁명론》 등 한나 아렌트의 주요 저서 여덟 권의 핵심 내용이 쉽게 설명되어 있다. 저자는 아렌트의 일대기를 따라가면서 왜 그 시기에 특정한 저작을 쓰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주는데, 이 방식을 통해 아렌트의 삶과 저작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를테면 ‘악의 평범성’, ‘세계 사랑’, ‘용서와 화해’ 등 한나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아렌트의 개인적 상황을 연결지어 설명하는 식이다.

한나 아렌트의 저작 중 특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여러 논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표현은 바로 ‘악의 평범성’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인터뷰에서 그 말이 “개개인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있고 또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하면서 아이히만에게는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상상하는 포괄적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아이히만을 광대라고 표현한 이유는 우스운 모습 때문이 아니라 분별력이 없고 폭넓게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강조했는데 이 책에도 사유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된다. 아렌트는 악에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사유’에 있으며, 스스로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저항’은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아렌트가 생각하는 사유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내적 경험으로, 이 사상은 훗날 아렌트가 자신의 최고 걸작이 되리라 예견한 《정신의 삶》 1부 ‘사유’의 집필로 이어진다. 이렇듯 아렌트는 삶과 저서를 통해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준 실천적인 사상가였다.

그밖에도 이 책은 전체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공적 영역의 강조 등 한나 아렌트가 한평생 주장하고 행동해온 바를 연대기 순으로 보여주며, 나아가 주요 저서들의 집필 계기와 그 주요 개념 및 영향, 뒷이야기까지 한눈에 조망해준다. 

저자는 그녀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시간 순으로 서술하면서 여러 일화들을 소개한다. 아렌트라는 개인이 지닌 다양한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학문과 사상 뒤에 가려진 역동적인 모습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 뜨거웠던 한 여인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명석하고 비범하면서도 퇴학을 당할 정도로 반항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학창 시절, 항상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다니며 수줍음 속에 타인의 시선을 즐기던 대학 시절, 스승과 제자로 만나일평생 애증의 관계로 지낸 하이데거와의 일화, 강제수용소 수감과 탈출, 두 번의 결혼과 노년기까지도 계속된 로맨스 등 한 편의 영화 같은 파란만장한 일생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또한 일평생 존경했던 스승 카를 야스퍼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소중한 친구 발터 벤야민, ‘부족’이라 불린 무리들과의 친밀한 우정, 아렌트와 교류했던 수많은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중간 중간 삽입된 흑백사진과 더불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임에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를 경계했으며, 인종차별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벌어진 학생시위와 블랙펜서 등 급진적 무장 단체들이 폭력을 정치 전술로 삼는 것 등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현실정치에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강대국의 침략전쟁은 계속되고, (그녀가 경고했듯)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으며, 빈부격차와 계층 간 갈등은 심화되기만 한다. 한나 아렌트가 살아 있다면 이 수많은 세계적 난제들에 어떤 해법을 제시했을까? 우리 모두가 스스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면 풀기 어려워만 보이는 문제들도 언젠간 해법을 찾을지 모른다. 경험하고, 생각하는 삶을 통해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 한나 아렌트가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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