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의 교착상태를 거침없이 돌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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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의 교착상태를 거침없이 돌파하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0.1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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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할 권리 |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 김수민 옮김 | 창비 | 392쪽

 

옥스퍼드대학교 최연소·최초의 여성·유색인 올솔스 칼리지 사회정치이론 치첼리 석좌교수인 저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이 책에서 도발적이면서도 탄탄한 철학적 접근과 예리하고 명료한 산문으로 21세기 페미니즘의 섹스에 대한 접근을 고찰하고 그 한계와 고민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미투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의 새로운 부흥기를 불러왔다. 처음에는 피해 여성의 성관계 동의 여부가 심판대에 올랐고, 그후에는 남성 권력자의 은근한 혹은 노골적인 성적인 요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조건과 위치에 놓인 여성의 ‘동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며, 만약 ‘동의’가 불완전하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여성의 성적 자율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일각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성적 자율권을 옹호하고 성 해방을 주창한 제2물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성관계에 있어 ‘동의’ 여부에만 집착함으로써 젠더 간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간과하고 오히려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에게 자발적으로 종속되도록 함으로써 페미니즘을 퇴보시켰다고 비판한다.

미투운동이 불러온 페미니즘의 부흥과 논쟁은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생물학적 여성’을 페미니즘의 주체이자 궁극적으로 해방되어야 할 최후의 피억압 계급으로 보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즘(TERF)과, 인종/계급/섹슈얼리티와 같은 ‘억압의 다양한 축’을 고려해 피억압 계급의 외연을 확장할 것을 강조하는 교차성 페미니즘 사이의 치열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옥스퍼드대학교 최연소·최초의 여성·유색인 올솔스 칼리지 사회정치이론 치첼리 석좌교수인 저자 스리니바산은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을 통해 래디컬 페미니즘과 교차성 페미니즘 두 입장의 대립을 낱낱이 해체하며 날카로운 지성과 뚝심으로 페미니즘의 교착상태를 거침없이 돌파한다.

이 책은 총 여섯 꼭지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에서는 미투운동으로 화두가 된 피해자 중심주의의 필요성과 그 한계를, 「포르노를 말한다」는 페미니즘의 프로섹스-안티섹스 논쟁을 파헤치며 성적 재현의 문제를 다룬다. 아일라비스타 살인사건과 남성의 성적 권리의식을 다루는 「섹스할 권리」와 그에 이어지는 「욕망의 정치」는 그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과 ‘섹스할 권리’(즉,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의 성적 욕망에도 정치적 검토와 재교육이 필요할 수 있다는 도발적 주장을 제시한다.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는 권력관계 내 성관계를, 「섹스, 투옥주의, 자본주의」는 페미니즘 내 반성매매-성노동론 논쟁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엄벌주의·투옥주의 페미니즘과 계급·인종 문제의 교차성을 논한다.

꼭지마다 논쟁적이고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이 글들은 섹스에 대한 정치비평을 재구성하려는 21세기 페미니즘의 시도이기도 하다. 제2물결 페미니즘과 제3물결 페미니즘을 변증법적으로 오가며 그 너머에 가닿으려는 저자의 시도는 자칫 모호하게 보이거나 양쪽 모두에게서 공격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글은 그런 공격쯤은 가뿐히 받아넘길 만한 뚝심과 자신감, 그리고 무엇보다 빈틈없는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복잡한 지형도에서 더 복잡한 길을 세심하게 파내는 저자의 글은 철학적 사고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까다로워서 말로 옮기기조차 어려운 논점들을 서슴없이 지적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흔들어놓고, 우리가 못 보는 더 큰 틀을 보여주고, 논리의 오류나 윤리의 맹점을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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