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지위 그리고 보람 …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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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지위 그리고 보람 …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3.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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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42강>_ 노명우 아주대 교수의 「돈과 지위와 보람」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시리즈 ‘삶의 지혜’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어 있다. 42강 노명우 교수(아주대 사회학과)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노명우 교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부제가 왜 ‘어떤 가족의 몰락’일까란 화두로 시작하여,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의 입을 빌려 그 답을 내놓는다. “우리는 경제적 풍요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데,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실제적인 모습에는 관심이 적다. 이 둘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어찌 보면 보람이 없는 삶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이유일 수 있다.” 즉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며 “경제적 발전 역시 인간다움을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이지, 경제 발전 자체가 인간다움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같은 지적을 받아들인다면 부(富)란 “우리들이 실질적인 자유를 획득하도록” 도울 때만 유용하다는 인식 아래 이제는 “심각하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진단한다.

▲ 지난 2월 1일, 노명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2월 1일, 노명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토마스 만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 “어떤 가족의 몰락(Verfall einer Familie)”이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제목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이 부덴브로크 가족임을 드러낸다면, 부제는 부덴브로크 가족 이야기를 통해 토마스 만이 전하고 싶은 주제 의식을 표현합니다. 부제처럼 이 소설은 부덴브로크라는 한 시민계급 가족이 돈과 지위 그리고 명성까지 모두 얻고 난 이후의 몰락을 여러 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를 통해 섬세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독일의 북쪽 상업 도시 뤼벡입니다. 토마스 만은 19세기라는 시간과 상업 도시 뤼벡이라는 공간을 배경 삼아 시민계급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19세기는 전통적 지배계급이던 귀족과 새로 부상하는 시민계급이 경쟁하던 시기입니다. 신분제 사회는 몰락했고, 시민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로 교체되어가고 있지만, 귀족이 갖고 있는 사회문화적 프리미엄은 여전히 작동하던 때이지요. 시민계급은 귀족을 능가하기 위해 상승해야 했습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역시 상승하는 그 길을 따라갑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요한 부덴브로크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시민계급입니다. 그는 부를 추구합니다. 토지 소유를 통해 부를 유지했던 전통적 귀족과 달리 시민계급은 상업을 통해 부를 획득하려 합니다. 요한 부덴브로크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지었는데, 그 요한 부덴브로크 회사가 번창 일로를 달립니다. 소설은 1835년 부덴브로크 가가 새로 이사한 멩 가에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로부터 시작됩니다.

요한 부덴브로크가 이룩한 부는 그들에게 시민계급 정체성의 근원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 시민계급이 귀족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요한 부덴브로크의 아들 요한(장) 부덴브로크 2세가 가업을 물려받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가 이룬 요한 부덴브로크 회사를 잘 경영합니다. 요한(장) 부덴브로크 2세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토마스 부덴브로크가 가업을 물려받습니다.

귀족과는 다른 시민성을 시민계급 1세대는 부의 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시민계급의 1세대는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라는 호칭을 얻지는 못했지만, 마침내 세상이 시민계급의 편으로 기울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의 부를 획득했습니다. 부를 획득한 시민계급의 상속자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시의원에 당선됩니다. 돈과 지위를 모두 얻음으로써 부덴브로크 가의 영예는 3대인 토마스 부덴브로크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합니다. 행복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는 순간 부덴브로크 가문엔 숨겨진 근심이 있습니다. 몰락을 재촉하는 내부로부터의 붕괴 요소가 부덴브로크 가문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의 아들, 즉 부덴브로크 가문의 4대인 하노 부덴브로크는 병약하고 비실천적인 몽상가에 가깝습니다. 아들 하노는 아버지 토마스의 시민계급적인 출세욕, 부에 대한 욕망을 물려받지 않았고 오히려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재능을 보입니다. 아버지 토마스에게 음악은 사교적 수단이나 시민계급의 위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적 요소에 불과했는데, 하노에게 음악은 그 자체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 고독한 도취입니다. 하노는 아버지의 시민계급 남성적 기대에서 어긋납니다.

아들로부터의 위기뿐만 아니라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내적으로 팽팽한 긴장감에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명예욕을 유지하는 것, 시민계급의 계급적 기반인 상업적 성공을 유지하는 것,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자신에 대한 긴장을 잠시도 늦추지 않으며 시민계급의 성공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소설에서 그는 치과에서 발치한 후, 몽롱한 상태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한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치과 치료는 사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죽음 이전부터 겉으로 보이는 점과는 달리 깊은 내적 갈등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추구했던 부를 지키고, 그 부를 바탕으로 아버지 세대의 시민계급은 갖지 못했던 명예까지 도달했으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절대 내적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부덴브로크 가의 몰락을 다룬 토마스 만의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귀족을 능가하는 돈을 벌었고, 귀족에 상응하는 지위까지 얻었으나 결국 그 정점에서 몰락하기 시작하는 한 시민계급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 함께 생각해볼 주제인 돈과 지위 그리고 보람이라는 문제를 다각도로 생각하기에 아주 적절한 문제 제기라 생각합니다. 이제 잠시 무대를 고대 그리스로 옮겨볼까 합니다.

왜 마라톤에 참가했을까?

지금 여러분은 뛰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뛰고 있을까요? 우리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무엇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뛴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맹수로부터 추격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뜁니다. 둘째, 이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향해 왜 뛰고 있는 것일까요?

이들은 고대 올림픽에 참가한 마라톤 선수입니다. 우승자는 단 한 명입니다. 우승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마라톤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월계관이 주어집니다. 그뿐입니다. 월계관, 매우 영광스러운 상징입니다. 월계관의 경제적 가치(price)는 어떨까요? 월계관은 마라톤 우승자의 상징인 상(prize)일 때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물건이지만 시장의 교환가치로 환산된 월계관은 보잘것없는 물건이 됩니다.

우승을 한다 하더라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제로에 가까운 나뭇가지를 얻겠다고 뛰어가는 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고대 그리스 시대는 노예제 사회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노예는 말하는 동물이라고 취급받았습니다. 이들은 노예적인 삶과 노예적인 삶이 아닌 것을 엄격하게 구별했고, 인간은 노예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삶을 두 가지 형태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지 않기 때문에 살아가는 삶, 즉 연명하는 삶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연명하는 삶은 동물이나 노예로부터 인간을 구별시켜주지 못하기에 인간만의 고유한 삶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마라톤에 참가한 선수들은 자신이 노예가 아님을 그리고 노예적 삶이 아니라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승해도 고작 경제적 가치가 제로에 불과한 월계관을 얻을 수 있을 뿐이지만 목표를 향해 열심히 뛰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추구한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삶을 추구했을 때 얻게 되는 내적인 만족감, 저는 이것을 ‘보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토마스 부덴부르크에게 없었던 것이 바로 보람이지요.

돈으로 행복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강조합니다. 행복이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과는 달리 가장 자족적인 것, 즉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그 자체로 잘 사는 것이자 잘 행위하는 것입니다. 물론 행복을 위해서는 충족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조건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잘 행위하기 위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돈은 언제든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잘 행위하는 것”과 “잘 사는 것”을 보장할까요? 만약 “잘 사는 것”이 돈이 많은 것과 동일하다면 행복은 부의 크기에 비례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물론 돈과 행복은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한 사람도 세상에는 많으니까요. 하지만 돈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지위를 선택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보다 많은 돈을 손에 쥐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그저 습관처럼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왜 인생을 사는지 알 수 없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나를 둘러싼 주변을 통제할 수 없는 느낌을 받을 때 발생하는 공포와 무기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관심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한정하는 선택을 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조롱했던 최후의 인간(Der letzte Mann)이 딱 그 모습과 흡사합니다. ‘최후의 인간’은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불만족도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최후의 인간’의 관심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뿐이지요.

돈은 행복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이스털린이 증명한 하나의 역설

인간은 동물처럼 욕구/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욕구/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욕망적 삶’이라 불렀습니다. 이 욕망적 삶을 통해 우리는 ‘쾌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먹고 살아야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삶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익적 삶’이라 했습니다. 이 ‘이익적 삶’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우리는 경제적 이득, 즉 돈을 획득합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삶 역시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이 삶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삶’이라 불렀습니다. ‘정치적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낼 때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을 지닌 철학, 즉 philosophia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삶을 표현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관조적 삶’이라 불렀습니다. ‘관조적 삶’을 통해서만 인간은 ‘지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 한 인간은 네 가지 삶을 균형적으로 영위할 때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삶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요소 중 어느 한 요소만 발달하면 인간의 삶은 기괴해집니다.

현대인의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삶이라는 안경으로 들여다보면 균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도한 경제 지향적 삶을 살고 있고, 쾌락만을 쫓는 삶을 살고 있고, 눈치만을 보는 삶을 살고 있고, 아는 것이 너무 많기에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쟁 중심, 성과 중심 사회에선 모든 이들이 ‘이익적 삶’만을 삶 전체인 양 간주하고 ‘이익적 삶’에서 얻은 돈을 갖고 ‘쾌락적 삶’을 구매하려 합니다. 삶이 이러한 모습을 지닐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좋은 삶’에서 멀어져만 갑니다.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이냐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이냐.” 아주 잘 알려진 양자택일입니다. 누구도 호구책(糊口策)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돼지가 아니기에 호구책의 다급함에서 한 발자국 거리를 두면 잊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꿈을 다시 생각하는 순간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됩니다.

사회도 사람들의 삶의 단계를 꼭 닮은 변화를 보여줍니다. 배부른 돼지가 집단의 목표인 사회에서 경제의 총량이 커지면 사람들은 불어난 자기 배를 두드리며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만족은 한계효용의 법칙을 따릅니다. 자기만족을 느낄 수 없는 불감증은 마치 법칙처럼 대부분의 나라에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감은 1인당 GDP가 2만 달러 미만일 때는 정확하게 소득에 비례합니다. 하지만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는 임계점을 넘기고 나면, 사람들은 소득이 올라도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 이스털린(Richard A. Easterlin)이 바로 이러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한 상태일 때,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비루한 처지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거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정작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결정적 요인은 소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털린이 발견한 이 현상을 그의 이름을 따서 ‘이스털린 역설’이라 합니다. ‘이스털린의 역설’은 사람이 돈과 지위만으로 행복해지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최소한의 돈을 확보한 이후 인간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보람’이라는 주관적 만족의 영역이라는 것이죠.

‘이스털린 역설’은 한 사회가 절대 빈곤의 단계에서 벗어나서 1인당 GDP가 2만 달러에 도달하는 시점에 보통 나타납니다. 현재의 한국이 딱 그 시점입니다. ‘이스털린 역설’은 국가 단위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생에서도 나타납니다. 소득이 어느 정도 정점에 도달하는 중년의 나이가 한 개인의 삶에서 ‘이스털린 역설‘이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이스털린 역설’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소득이 올라가도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세계 가치관 조사

이스털린의 역설은 다소 철학적인 그리고 사변적인 주장처럼 들렸던 아리스토렐레스의 행복론을 사회과학적으로 증명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즉 돈은 행복을 설명할 수 있지만, 모든 행복이 돈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실제로 증명한 셈이지요.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돈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고 돈은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지만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더 이상 돈은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세계 가치관 조사」의 결과를 한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세계 가치관 조사」는 1988년부터 로널드 잉글하트 교수 팀이 주도하는 시민들의 가치관 변화에 대한 조사입니다. 이 조사는 동일한 질문을 전 세계 여러 나라 사람에게 던지고 나라별로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가치관의 차이를 국가별로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한국은 어떤 가치 지향적인 나라일까요? 불행하게도 혹은 예상했던 대로 한국인의 평균적인 가치관은 전통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 합리적 지향이 강합니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전통 가치로부터 빠른 속도로 이동한 나라라는 흔적이 한국인의 가치관에도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한국이 생존 가치 지향과 동시에 합리적 세속적 가치 지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나라라는 점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주로 발견되는 인간 유형은 ‘출세 지향적’ ‘물질 지향적’인 인간이라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출세 지향적ㆍ물질 지향적 인간 유형으로만 한 사회가 가득 차 있다면, 그 사회는 제한된 물질과 지위를 둘러싼 무한의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이런 경쟁으로 인한 강박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를 미워합니다. ‘보람’은 사치스러운 단어가 됩니다. 겨우 실패하지 않고 돈과 지위를 얻는 데 성공한 사람은 또 다른 내적 불안에 시달립니다. 돈과 지위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행복에서 뭔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내부로부터 붕괴된 토마스 부덴브로크처럼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실 돈은 중요하지만 돈만으로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되어왔던 문제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질문을 잊고 있을 뿐이지요. 아마르티아 센은 오래된 이 문제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경제학자입니다.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마르티아 센의 질문은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그는 이렇게 진단합니다. “우리는 경제적 풍요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데,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실제적인 모습에는 관심이 적다. 이 둘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어찌 보면 보람이 없는 삶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이유일 수 있다. 부란 명백히 우리가 추구하는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유용한 것일 뿐이며,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입니다. 경제적 발전 역시 인간다움을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이지, 경제 발전 자체가 인간다움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가 수단에 불과한 경제적 발전과 부의 축적을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이상 우리의 삶에서 보람이라는 차원은 어느새 사라지고 맙니다.

성장(growth)과 발전(development)은 다릅니다. 성장은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인간의 목적은 발전이지 성장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 자유의 확장이고, 이것이 발전의 수단이자 목적입니다. 발전 없는 성장은 웃자람에 불과합니다. 발전 없이 성장만 한다면 부와 지위는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치의 아노미 상태만 불러올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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