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오슬로와 스톡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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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오슬로와 스톡홀름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2.10.0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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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칼럼]

얼마 전 북유럽의 두 도시를 다녀왔다. 필시 정치학자라는 직업 때문이겠지만 오슬로 시청사와 스톡홀름 시청사 방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는 어쩌면 평소 알고 싶었던 ‘북유럽 정치’의 비법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정치는 정말 깨끗해요!’ 오슬로에 정착한 지 만 30년이 되었다는 현지 가이드가 오슬로 시청사에 들어서면서 던진 일성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구 130만 명의 오슬로시는 4년마다 59명의 시의원을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시의원은 오로지 정치적 신념과 소명에 따라 공적 헌신을 서약한 무보수 명예직 정치인이다. 그들 대부분은 따로 생업에 종사하며 매주 두 차례 정해진 시간에 시의회에 출석하여 시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한다. 의회 개원일에는 언론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아담한 회의실 2층 갤러리에서 자유롭게 방청한다. 물론 의회 토론의 전 과정은 시민들에게 실시간으로 송출된다.
   
오슬로 시청사 1층 중앙홀에는 북유럽 신화, 왕실 역사와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을 담은 벽화가 사면을 장식하고 있다. 마치 시민들이 신 또는 왕족과 동일한 신분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중 백미는 시민들의 삶을 묘사한 다채로운 장면 가운데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고 도망치던 임신부를 숨겨주려다 뒤쫓아 온 관원에게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귀족의 이야기를 구현한 벽화였다. 바로 시민들에 의해 ‘오슬로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된 홀바르드(Hallvard) 성인이다. 그는 어쩌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기준, 즉 ‘오블리스 노블리주’라는 정치적 덕목을 상기시키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매년 12월 10일 청사의 중앙홀에서는 노르웨이 국왕 부부, 수상자와 가족 및 친지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엄선된 하객 등 1,500여 명이 초대된 가운데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엄숙히 거행된다고 한다. 알프레드 노벨이 제정한 여섯 분야 상 가운데 유일하게 평화상만 노르웨이에서 시상된다. 이는 노벨상 제정 당시 노르웨이가 스웨덴과 병합 상태였고 노벨이 평화상 선정 임무를 특별히 오슬로 시의회에 맡겼기 때문인데, 1905년 노르웨이의 분리 독립 이후에도 그 전통이 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11년부터 23년까지 12년에 걸쳐 붉은 벽돌 8백만 장으로 지어진 스톡홀름 시청사는 같은 듯 다른 형태의 시정(市政)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노벨상 시상식 이후 화려한 만찬·연회장으로 사용되는 청사 1층 메인홀은 평소 기업이나 일반인들이 사적인 용도로 대여할 수 있다고 한다. 2층에 있는 금으로 그린 벽화로 사면이 장식된 연회실 역시 시의 금고를 채우는 중요한 재원이다. (현지 가이드가 들려준 여담이지만 스웨덴의 국왕인 카를 구스타프 16세는 수년 전 주식 투자로 상당한 손해를 본 후 왕궁을 관광 수입원으로 돌리기 위해 가족과 함께 여름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지엄한 왕실조차 냉엄한 경제 원칙을 비켜 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다시 스톡홀름시의 시청사 얘기로 돌아가면, 상시 관광객과 공중에 개방된 구역의 북새통과 잘 분리된 시청사 내 업무 구역에는 약 400여 명의 공무원이 인구 백만의 스톡홀름시 행정을 돌보고 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이 숫자는 인구 천만인 서울시가 2021년 현재 약 2만여 명의 공무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확실히 대조된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모든 행정 체계가 시스템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스톡홀름시는 4년마다 총선과 함께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통해 시의원 101명을 선출한다. 2018년 선거에서도 총 9개 정당 출신의 비례대표 101명이 선출되었고 그들은 오슬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생업과 의원직을 병행하고 있다. 시의회는 매 3주 차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개원하며 일반 시민들은 의사당에 직접 나와 회의의 전 과정을 방청하거나 웹캐스트 또는 라디오를 통해 실시간으로 청취할 수 있다. 이러한 투명한 시의회 운영방식은 오슬로 시의회와 거의 판박이다. 

내친김에 조금 더 조사를 해보니 스톡홀름 시의회는 ‘시(市)집행이사회(The City Executive Board)’와 ‘시장단(The Council of Mayors)’이라는 독특한 행정 시스템을 통해 운영되고 있었다. 시 집행이사회는 일종의 ‘내각’으로서 101명 의원 중에서 선출된 13명의 이사로 구성되며 시 집행사무국의 전문화된 행정 지원을 받는다. 집행이사회는 개원에 필요한 의제를 설정하고 부속 자료를 준비하여 동료 시의원들이 사전 검토하도록 제공하며, 결의된 사안들을 집행·감독·평가하고, 시의 재정 및 미래 발전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진다. 

시장단은 101명 시의원 가운데 51명을 확보한 다수파가 시장과 9인의 부시장을, 소수파가 의결권이 없는 나머지 5명의 부시장을 선임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시장단’에 속한 15명은 ‘전업’ 정치인이다. 다수파 출신 부시장 9인은 각각 시정기획, 교통, 문화·도시환경, 학교·교육, 노동시장·통합·스포츠, 환경·기후, 사회사업, 노령자 보살핌·공공안전, 주거·부동산 부처의 장이 되며 소수파 5인은 무임소 부시장이다. 시장단은 집행이사회에 부처 업무에 관해 보고할 의무가 있으며, 이사회는 나머지 시의원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 시장은 시 집행이사회와 시장단의 의장직을 겸직함으로써 입법과 행정의 유기적 연계를 도모한다. 

이처럼 ‘디테일’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오슬로와 스톡홀름 시정의 공통점은 ‘깨끗한 정치, 신뢰받는 정치인’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북유럽 정치’의 최고 덕목이다. 그 비법으로는 주로 다음 세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무보수 명예직 시의원의 존재, 둘째는 다당제와 정치연합 관행, 그리고 셋째는 소규모 정치공동체의 소통 편의성이다. 이 요인들의 정치적 함의를 순서대로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자. 
  
고대 아테네인들은 아고라에서 펼쳐지는 정치적 삶(bios politikos)과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삶(bios oikos)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시민이 생활의 필요를 충족한 이후 정치의 장에 들어가야만 오롯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견지에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정치 행위는 경제활동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라는 통찰을 제시했다. 오슬로와 스톡홀름의 시의원들이 무보수 명예직인 이유도 바로 이러한 맥락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특정 정당이 절대다수를 얻지 못하는 다당제 시스템은 정당이나 정치인이 당리당략에 매몰되지 않고 공동의 목표 달성과 정책 효율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분명 두 도시의 다당제에 기반한 정치연합과 권력 분점의 관행도 ‘깨끗한 정치와 신뢰받는 정치인’ 전통이 자리 잡는 데 주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정치공동체가 가지는 소통의 이점으로 보인다. 서울이나 경기도처럼 천만 명이 사는 메가시티의 시민보다 인구 백만의 오슬로나 스톡홀름의 시민이 훨씬 더 큰 정치적 존재감과 효능감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오슬로와 스톡홀름 방문은 개인적으로 장차 우리 정치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마침 여야 의원들이 모처럼 의기투합하여 ‘정치개혁 5법’을 발의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이미 여러 경로로 ‘개헌’의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정치권의 움직임은 아마도 우리 시민들 사이에서 ‘문제는 정치’라는 공감대가 빠르게 확산하는 중이며, 정치를 바꾸려면 그것의 토대인 법을 바꾸는 일이 급선무이기 때문일 게다. 이 오슬로시와 스톡홀름시의 이야기가 우리 정치 혁신을 위한 ‘생각의 양식(food for thought)’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2017), 『한국 민주주의의 새 길: 직접민주주의와 숙의의 제도화』(공저, 2022), 『문화의 이동과 이동하는 권리』(공저, 2022), 역서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 『책임과 판단』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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