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경성 문단에 나타난 재현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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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 문단에 나타난 재현의 위기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9.2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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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현에 도전하는 문학: 식민지 조선의 모더니즘 문학과 재현의 위기 | 크리스토퍼 P. 한스콤 지음 | 오선민 옮김 | 소명출판 | 345쪽

 

이 책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재현의 위기로 진단했던 세 사람의 모더니즘 작가를 다룬다. 박태원, 김유정, 이태준 세 사람은 구인회 맴버로서, 제국주의적 현실만을 말하게끔 하는 언어적 배치를 뒤흔드는 작업을 했다. 한동안 한국근대문학 연구가 중요하게 다룬 논점은 작품이 얼마나 억압된 식민지 현실을 그렸느냐에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든, 재현되어야 할 현실은 제국주의의 음화로서 먼저 주어진다. 이러저러한 근대적 제도가 없었다, 사람들은 부족한 물적 자원 때문에 고통받았고 정치적으로 차별받았다 등등.

말은 의도를 품고 글은 현실을 품는다! 우리는 언어의 의사소통적 모델에 기대어 생활한다. 언어란 투명한 매체여서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잉여 없고 누락 없이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 ‘의사소통 모델’의 전제이다. 이런 의사소통 모델에 바탕을 둔 언어를 ‘재현의 언어’라고 한다. re-presentation, 즉 현실을 다시 드러내는 언어이다.

이 언어관은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우선 발화자는 자기 할 말의 내용을 먼저 확정하게 된다. 의도는 공공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알아서 마구 떠드는 것으로 ‘의사소통’이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알만한 내용을 나눈다는 전제 하에서 그 의도의 진정성은 용인된다. 말과 글이 포착해야 할 것이 개인의 의도 이전에 미리 작동하는 것이다. 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쓴다고들 하지만, 써야 할 현실은 정해져 있다. 동아시아 근대가 ‘번역된 근대’(리디아 리우)였던 점을 다시 한 번 환기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이후, 서양 문학사가 규범으로 제시한 글쓰기는 두 가지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다. 둘 모두 의사소통 모델에 입각한 것이고, 전자가 ‘있는 그대로’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있는 그대로를 비틀고 변형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둘 모두 현실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여, 이러한 전제를 자명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말하고 쓰는 사람은 ‘마땅한 현실’에 끌려다니게 된다. 재현하는 언어란 있어야만 하는 현실을 옹립하기에 바쁜 언어인 것이다. 그런 언어에 사로잡혀 살게 되면, 당위와 의무로만 일상을 채워가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식민지의 언어적 정치성을 질문하는 책일 수만은 없다. 우리는 저자와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언어의 가능성, 읽어내고 표현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언어는 정말 투명한 매체일까? 식민지 조선의 작가들이 처한 곤경의 배면에는 ‘재현의 언어’가 강요하는 제국주의화가 있었다. 언어 자체가 제국의 일본어와 모어인 조선어로 위계화된 상황에서, 작가들은 식민의 현실이란 결코 언어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더욱 곤란한 것은 제국주의적 재현이 피식민자에게는 원초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담론은 피식민자로 하여금 ‘우리를 닮아라!’라고 명령한다. 즉 근대화해서 최대한 제국 일본을 모방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이 근대 담론을 완전히 학습해 일본인이 되면, 일본과 조선은 동등해지고 일본은 더 이상 제국일 수 없다. 그래서 제국은 그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너무 우리처럼은 말고!’ 이 책은 이 상황을 식민지의 이중구속이라고 명명한다. 즉 언어는 절대로 투명한 매체일 수 없다. 제국주의하에서 공식적인 국어가 일본어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에 내맡긴 언어는 현실정치의 힘-논리에 끄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투명한 매체가 아니라는 저자의 입장을 따라가다 보면, 재현되어야 하는 것과 그것을 재현시키는 방법을 떠받치고 있는 상징자본의 권력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정확성을 따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재현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려는 욕망의 정치성을 묻고, 재현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언어적 감수성을 높이는 과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 책은 식민지 모더니즘 문학에 나타나는 재현의 위기를 다룬다. 하지만 말할 수 있음과 쓸 수 있음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언어적 가능성을 놓고 넓고 깊게 질문한다. 그래서 ‘언어’를 둘러싼 여러 고민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문학이란 작가적 자의식의 산물도 아니고, 시대의 전형성을 포착하는 카메라도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현실의 자명성을 의심하고 다른 형태의 삶을 모색하려는 시도 속에서 쓰인 모든 것은 문학이 된다. 그렇게 문학은 시장과 제국주의를 초월해서, 이 책의 원래 제목처럼 The Real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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