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연구로 일궈낸 현대 생태학의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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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연구로 일궈낸 현대 생태학의 전범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9.2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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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 | 길버트 화이트 지음 | 박정희 옮김 | 아카넷 | 800쪽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은 영국 성공회 성직자였던 길버트 화이트(1720~1793)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 셀본 지역의 동식물 생활상, 지질학, 기후, 오래된 풍습 등에 대해 저명한 동물학자 토머스 페넌트와 박물학자 데인스 배링턴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세밀한 관찰을 통해 존재들의 상호 연관 관계를 드러낸 생태학의 고전인 이 책은 18세기 이후 서구에서 유행한 자연문학의 전형으로도 평가되며, 찰스 다윈, 윌리엄 워즈워드, 헨리 소로, 토머스 칼라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버지니아 울프, 위스턴 휴 오든 등 19~20세기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화이트는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문체로 자신이 발견하고 관찰한 사실들을 편지에 써내려간다. 셀본 지형의 특징과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행동, 습관, 목소리 등에 대한 묘사, 새들의 이주에 관한 그의 장기간의 묘사는 자연문학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자연사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를 넘어 구불거리는 길, 높은 언덕 위의 샘, 행어와 숲과 연못, 이 산과 저 산의 일정한 거리에서 발생하는 메아리, 끝없이 이어지는 거미줄, 이슬과 서리, 공기와 날씨, 지형까지 셀본의 모든 것이 화이트의 관찰 대상이었다.

화이트는 특히 조류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종류의 새가 언제 셀본 지역에 나타나는지, 번식기에 어떻게 짝짓기를 하고 알을 몇 개 낳는지, 둥지는 어디에 어떻게 짓는지, 먹이는 어떻게 구하는지, 언제 돌아가는지, 날씨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등에 대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과학적 지식을 축적해 나간다. 

훗날 화이트의 면밀한 관찰 기록은 현대 이론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선구적인 현장 연구 없이는 진화론이 결코 제시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세부 사항의 정확한 기술이 축적된 새로운 종류의 동물학이었다는 평가, 현대 생태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셀본의 유물들」(2장)에서는 로마시대의 동전을 발견한 이야기, 역대 왕이나 왕자들과 관련한 일화, 그들의 정원과 사냥터, 수도원, 템플기사단, 수도원 건축 양식, 역대 수도원장들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 자연에 영향을 미치는 영국의 날씨 변화 양상, 나무들의 경제성 비교, 교역을 통한 해충의 이동, 수도원 주변 이웃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 미신적 관습, 보헤미안에 관한 이야기, 색슨족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셀본 마을의 명칭 등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사실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자연 관찰」(3장)에서 화이트는 새, 네발짐승, 곤충, 벌레 등에 관해 린네 학회 회원인 마크윅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여러 종들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뒷부분에 실린 식물 관찰에서는 ‘까마귀도 먹이시는 하느님을 좇아서 박물학자로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를 희망’했던 화이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화이트와 마크윅의 박물학자 달력 비교」(4장)에서는 다양한 동식물의 등장과 개화, 짝짓기와 집짓기 등에 관한 연간 기록이 비교되고 있다. 이 같은 생물계절학(Phenology)적인 연구는 한 인간의 평생을 바친 소중한 기록이며 자연과 생명 세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구이다. 마크윅은 화이트만큼 그렇게 상세하게 자연을 관찰한 저자를 본 적이 없다고 경탄한다.

마지막 장에는 화이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책 중간에도 농부 피어스로 알려진 로버트 랭글런드, 존 필립스, 밀턴, 톰슨, 루크레티우스 등의 시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농경시〉는 계속해서 책 전반에 인용되고 있고, 가끔 화이트 자신의 시도 몇 편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시 몇 편만이 아니라 그의 설명과 묘사는 곳곳에서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이후의 시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새들의 지저귐을 노동요 삼고, 주변의 동식물을 관찰하는 일상적인 삶이 소중했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속도를 늦추고 우리 주변의 세상을 관찰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연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책 서문에서 화이트가 “독자들이 창조의 경이로움에 더 즉각적인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듯이 급격한 환경 변화의 시기에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즉각적인 관심”은 여전히 매우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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