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욕망과 스마트주의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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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욕망과 스마트주의의 배신
  • 이광래 강원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9.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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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말_ 『고갱을 보라: 욕망에서 영혼으로』 (이광래 지음, 책과나무, 316쪽, 2022.08)
 
 

1.

이 책, 『고갱을 보라: 욕망에서 영혼으로』는 저자(철학자)의 반시대적, 반시류적 쓴 소리다. ‘너 자신의 영혼을 살펴라’고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잠언이나 “커진 육체는 영혼의 보충을 기다리고 있다”는 베르그송의 충고처럼 철학자들이 지녀온 파레시아(parrêsia), 즉 ‘진실 말하기’의 강박증에서 저자의 마음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19세기 말의 유럽을 휩쓴 데카당스 속에서 날로 발전해가는 산업문명의 혐오증에 시달려온 폴 고갱(1848~1903)이 만년에 타히티에서 던진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98)라는 철학적 질문을 상기하려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저자가 1891년 봄 마침내 욕망이 난무(亂舞)하는 물랭루즈의 도시 파리를 등지고 ‘영혼의 고향’을 찾아 떠난 고갱의 선구를 통해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예단하기 위해서다.   

 2.

하루가 멀게 둔갑하는 초연결의 ‘상전이’(相轉移)야말로 현대인에게 꿈같은 편익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리스크를 안겨주는 야누스와 같다. 메타버스의 초욕망(超慾望)이 낳은 그것은 이미 거대한 하나의 ‘디지털 원형감옥’(digital panopticon)을 통치하고 있는 초권력이나 다름없다. 싹쓸이(sweeping)의 마력으로 그것이 우리의 욕망을 그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영혼의 개기일식 속에 누구라도 속절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권력은 본래 무엇이든 결정하려는 ‘힘의 의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권력의 계보는 결정론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절대권력일수록 ‘결정론’을 프로파간다로 삼지 않는가? 이를테면 ‘미래는 AI가 결정한다’는 디지털결정론자들의 선전이 그것이다. 빅나인(Big Nine)을 비롯한 디지털 싹쓸이꾼들은 이 순간도 그 신조(Credo)를 앞세워 미증유의 전체주의적 엔드게임을 전개하고 있다. 인류의 ‘스마트한’ 미래가, 그리고 인간의 ‘행복한’ 삶이 애오라지 인공지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선동하는 유토피아에서는 유전자(피의)결정론은 물론 창세신화를 논하는 의지결정론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다. 디지털 대중은 인공지능보다 더 ‘스마트’(smart)한 편익의 구세주가 있을 수 없고, 행복한 삶을 담보해줄 확실한 보장자가 있을 수 없다는 프로파간다를 굳게 믿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3.

디지털 기술의 최대한 이용을 유혹하는 사회에서 그 스마트(?)한 기술은 이미 편리함과 안락함을 넘어 어떤 ‘인륜적 죄책감’도 없이 인간을 그것에 종속시키는 지배 권력임을 의미한다. 세상은 이미 초인적 유령에 홀린 듯 새롭게 출현한 초연결, 초지능 기술의 최적화, 개인정보의 지구적 총합화(단일종합원장) 등 ‘디지털 대전환’(DX: Digital Transformation)의 완성에 대한 지구적 프로파간다로 ‘세기의 내기’를 벌이고 있다. 

일찍이 영혼의 개기일식 현상에 대해 비상한 통찰력을 발휘한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이었음에도) 『기술―세기의 내기』(La Technique ou L’enjeu du siècle, 1954)에서 

  “아 슬프다!, “인간은 마치 병 속에 갇혀 있는 파리와 같다. 문화, 자유, 창조적 수고를 위한 그의 노력은 기술이라는 파일 캐비닛 속으로 들어가는 시점에 다가와 있다”
 
고 암울하게 판단했던 까닭, 나아가 반세기 이상이 지난 뒤 미국의 미래학자 에이미 웹(Amy Webb)이 『빅 나인』(The Big Nine, 2019)에서 제시한 ‘파국적 시나리오’, 즉 지금부터 또 다시 반세기가 지날 2069년 즈음 도래할 시대상황에 대해 

  “앞으로 벌어질 일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폭탄보다 더 위협적이다. AI에 의한 폐해는 느리고 막을 수 없다. …미국은 종말이다. 미국 동맹국의 종말이다. 민주주의의 종말이다. 인공지능 왕조의 즉위, 그것은 잔인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절대적이다”

라고 비극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렇듯 ‘기술은 민주주의의 작용을 교란한다’는 엘륄의 말대로 웹도 ‘민주주의의 파국적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메타버스와 AI에 의한 유니버스의 종말은 민주주의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사정은 시장경제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종말도 마찬가지이다. 일자리의 급속한 대체현상에서도 보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메타버스와 AI의 싹쓸이 욕망은 빠른 속도로 인본주의의 종말을 가속화시키며 결국 그 토대까지도 전도시켜가고 있지 않은가? 인륜을 뒤로하는 스마트지상주의 속에서 속출하는 기술(생산력)들이 새로운 ‘세기적 내기’에 참을성을 잃은 지 오래기 때문이다.  

 4.

하지만 AI가 주도하는 싹쓸이 내기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있을 수 없다. 어떤 윤리적 반성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스마트한(?) 편익만을 위해 내기를 벌여온 디지털결정론은 모두에게 AI의 부메랑을, 즉 스마트지상주의의 배신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배신은 다행히도 ‘스마트’의 우선적, 본질적 의미에로 되돌아가게 하고 말 것이다.  

8, 9세기의 고대 영어에까지 소급하지 않더라도 ‘스마트’의 우선적 의미는 ‘아픈’, ‘쑤시는’, ‘괴로운’, ‘벌 받는’이고 ‘말쑥한’이나 ‘세련된’은 그것의 말단의 뜻이다. 예컨대 속 쓰리는 돈인 손해배상금을 ‘스마트 머니’(smart money)라고 하거나 매우 치명적인 유도폭탄을 ‘스마트 폭탄’(smart bomb)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그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파놉티콘, 즉 지구적 수용소에 갇혀있는 거대한 군중도, 디지털 농장에서 양육될 미래의 신인류도 모두 AI결정론자들에게 세뇌당한 채 편익지상주의와 망(網)강박증에 사로잡혀 영혼의 개기일식과 같은 징벌과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스마트’에 대한 오해와 착각, 게다가 그것에서 비롯된 존재하지 않는 세상, 이른바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욕망(超慾網)을 꿈꾸는 스마트지상주의는 일종의 지구적, 세기적 밴드왜건(bandwagon) 현상이나 다름없다. 영혼부재의 디지털 수용소에서 집단적 디지털 사디즘에 중독되어버린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인공지능이 제조해내는 정신적 스마트폭탄 세례의 피해자임에도 편익과 안락(pleonexia)만을 위해 영혼의 기능을 상실한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편익과 안락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유혹과 욕망의 피해망상 때문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도 갈피조차 잡지 못할 것이다. 영혼의 감지(sniffing)와 감응(telepathy)에 예민한 수감자일수록 파국의 즈음에서야 비로소 (파리에서의 고갱이 그랬듯이) 디지털 미세먼지가 자욱한 파놉티콘에서 영혼의 부활과 자유에 대한 갈망에 목말라할 것이다.  

 

 5.

“아! 대지의 영혼이여, 이방인이 그대의 양식으로 그대에게 나의 심장을 바치노라!” 이것은 고갱이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땅 타히티에 발을 내디디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고갱은 영혼(inner man)을 감지한 희열과 해방감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토로했던 것이다. 지난날 ‘마치 병 속에 갇혀 있는 파리’처럼 “나는 산업문명으로 썩은 서양을 하루 빨리 떠나고 싶소”라고 절규했던 그가 1899년 3월, 기념비적인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그린 뒤 (친구인 앙드레 퐁테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것은 그림의 제목이 아니라 영혼의 서명(sign)이다’라고 말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광래 강원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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