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을 중시해야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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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중시해야 미래가 있다
  • 민경찬 논설고문/연세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9.1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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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찬 칼럼]

대한민국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선진국의 모든 것을 벤치마킹하며 모방과 개선을 통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고속성장을 해왔다. 이러한 고속성장은 어떤 과정이나,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개의치 않고 성공적인 ‘결과’만을 중시한 우리의 목표지향적 행동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 문화는 아직도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미래 시대에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과 행복감을 높이고 선도적인 국가로서 위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정’도 중시하는 사회로 대전환해야 한다. 성장 발전 과정, 사고 과정 관련 몇 가지 주요 사례들을 생각해본다. 

우리 사회에는 노벨상을 올림픽 금메달처럼 목표로 삼는 분위기가 있다. 다음 달 10월이 시작되면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시작된다. 우리 언론과 사회는 한국 학자들의 이름이 나오기를 고대하며 수상자 발표에 촉각을 세울 것이다. 작년에도 실망의 분위기와 함께 과학계를 향한 쓴 소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동안 투자를 많이 했는데 왜 아직 노벨과학상이 하나도 안 나오느냐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노벨상 수상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노벨과학상 수상자들마다 ‘한국이 노벨상을 목표로 하지 않아야 노벨상을 탈 수 있다’라는 조언에 우선 귀 기울여야 한다. 기초과학 연구는 장기적 지원이 필요하다. 요즈음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연구성과를 얻는 데 20년, 수상까지는 30년 이상 걸린다. 연구성과는 우수 저널 게재, 피인용도가 아니라, 발견, 발명, 진보를 통해 인류에게 가장 훌륭하게 기여한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초과학 연구 지원에 큰 영향을 주는 기재부, 국회, 감사원 등은 ‘투자 대비 가시적 성과’라는 단순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실패도 허용이 안 되며 예산 낭비라는 비난과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우리의 연구를 대개 네이처, 사이언스 등의 유명 저널 게재, 숫자적 지표에 만족하는 수준에 머물게 한다. 지금과 같은 단기적 사고, 철저한 관리를 위한 획일적인 틀 안에서 연구자를 지원하면 노벨상은 기대할 수 없다. 지난 5월 한국에 온 201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랜디 셰크먼 교수는 ‘연구자에게 특정한 방향을 정하지 않고 지원해야 혁신적 발견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얼마 전 전국적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모의평가를 실시했는데, 한국의 교육은 마치 수능 고득점, 일류대학 합격이 목표가 된 것 같다. 그런데 학생과 학부모는 수능점수, 대학 입학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 몇 년을 거치며 공정성, 객관성 논란으로 대입 정책에서 수능 점수 중심의 정시 모집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수능이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인데, 현재 수능은 단순 암기력만 측정하는 학력고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수능 점수로 줄 세우는 교육 생태계는 과연 학생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학생 4명 중 1명이 학업성적 때문에 자해 또는 자살을 생각하게 하는 생태계다. 

우리 사회는 학생들이 수능 준비 등의 학습 과정과 학교 생활 과정에서 무엇을 얻게 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재 학생들은 100세 글로벌 시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여러 번 바꾸게 될 것이다. ‘일, 일하는 방식’이 빠르게 변하며, 대학 학위 자체의 효용성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학습과정을 통해 예측조차 하기 어려운 미래사회에서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당당히 대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초 역량, 태도를 위한 훈련 그리고 개개인의 특성과 잠재력을 다양하게 맞춤형으로 꽃 피우게 돕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수학에서 수능처럼 많은 문제를 빨리 풀며 틀리지 않고 정답을 얻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수학 문제를 풀 때 한 단계씩 넘어가는 과정마다 수학적 의미를 생각하는 훈련이다. 이는 평생의 핵심 역량이 되는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 생각의 힘을 키우게 한다. 더 나아가 이는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게 한다. 서술식 문제를 긴 시간 궁리하며 해결해나가는 과정은 미래 일자리에서 부닥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과 닮았다. 

우리의 정치권은 어떠한가? 가장 큰 문제는 과정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고 했던가, 요즈음 상황을 보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에 대한 부담조차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안이나 안건에 대한 의사결정과정이 불투명하거나, 부당하거나, 정당한 절차를 따르지 않는 일들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사상누각으로 만드는 일이며,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 다음 세대에게 매우 나쁜 선례를 넘겨주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국회의원 등 정치인, 정치 지도자로 등장하는 과정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정치가 저질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정치 경험이 부족한 ‘어쩌다 정치인’보다 경험, 경력, 능력, 품성 등에서 ‘준비된 정치인’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 선진국들처럼 젊은 시절부터 단계적으로 훈련받으며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되는 프로세스가 없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의견들을 존중하며 토론, 협업하는 훈련을 경험하고, 청년 시절부터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는 여러 형태의 트랙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는 대학의 책무의 하나로도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지구촌은 어떠한가? 18세기에 시작된 1차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과학기술과 자연 자원과 환경을 이용하여 오직 산업 발전, 경제 성장만을 목표로 열심히 달려왔다. 그런데 현재 인류는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물다양성 고갈, 자원위기, 양극화 등에 따른 생존 위기로 몰리고 있다. 지난 7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재난과 관련하여 “우리 앞엔 '집단자살이냐 집단행동이냐'란 선택이 있을 뿐이다.”고 경고했다. 이는 그동안 오직 인간의 풍요와 편리만을 추구할 뿐, 산업혁명 과정에서 파생될 수 있는 여러 장∙단기적 문제점에 주의하지 않았고, 문제를 알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정도의 오만한 태도를 취했던 결과다.

오늘 우리는 4차 산업혁명, 팬데믹이라는 대전환의 시대에도 대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인공지능, 유전자 기술에 의해 나타날 ‘신인류’와도 공존해야 한다. 현재 전 세계에 고통을 주고 있는 코로나 19와 최근 전례 없이 나타나는 기후변화 관련 재난 위기는 바로 눈앞의 생존 과제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의 정치, 경제, 교육, 과학기술 등 모든 영역이 그동안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는 물론 특히 이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중시하며 ‘지속가능한 미래’의 관점에서 재평가, 재정립해야 할 때다. 우리 모두와 다음 세대들 개개인의 삶과 국가,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해, 현재 닥쳐오는 지구촌 위기 차원에서 적극 대처하는 일이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민경찬 논설고문/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연세대 수학과 명예교수로 연세대 대학원장, 대한수학회 회장, 국제퍼지시스템협회(IFSA) 집행이사, 교육과학기술부 정책자문위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과학기술분과 의장, 포스코청암재단 이사, 국무총리 소속 인사혁신추진위원회 민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과학자문위원회(SAB) 위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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