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는 태평양의 ‘발견’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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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는 태평양의 ‘발견’에서 시작됐다
  • 고정휴 포스텍·한국근대사
  • 승인 2022.08.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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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태평양의 발견과 근대: 조선 세계와 마주하다』 (고정휴 지음, 나남출판사, 448쪽, 2022.07)

 

“고요한 바다”
“바다 중의 바다”
“끝 모를 텅 빈 공간”
“지구상의 단일 품목 가운데 가장 큰 물건”

모두가 태평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바다를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바라보는 것,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태평양은 유럽인의 창안물(invention)이었다. 그들의 발견은 마젤란(일행)의 세계 일주에서부터 ‘쿡 선장’의 세 차례에 걸친 태평양 탐사에 이르기까지 대략 3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주역인 마젤란(Ferdinand Magellan)과 쿡(James Cook)은 태평양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원주민들에게 희생당했다. 그것은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장엄한 인간 드라마이기도 했다. 그들의 욕망과 도전이 세계를 하나로 묶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 문명이 생겨났다. 태평양의 발견은 곧 서양이 주도하는 근대 세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구적 차원의 공간혁명이었다.

한국의 근대 또한 태평양의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해 왔다. 아니 아예 몰랐거나 외면해 왔다. 따라서 우리의 근대에 대한 설명은 무언가 빠진 듯 허전하고 명료하지 않았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자. 한국의 근대는 ‘개항(開港, 1876)’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바닷길을 연다는 뜻이다. 이때의 바다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황해인가, 남해인가, 아니면 동해인가? 한반도 주변의 이들 바다는 옛적부터 우리의 활동 무대였다. 그렇다면 1876년의 개항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책은 태평양의 ‘발견’에 따른 근대 세계의 구성과 조선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발견이라고 함은 단순히 지리적인 발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사적인 발견, 나아가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인 헤게모니적 관점에서의 발견을 포괄한다. 이러한 발견의 시초는 조선조 후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집중적으로 살피려는 시기는 이른바 개항기(1876~1910)이다. 이 시기에 조선인은 땅에서 바다로, 대륙에서 해양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에서 서양(특히 미국) 주도의 ‘세계(world)’ 질서로의 이행 과정이기도 했다. 태평양으로 향하는 바다를 열고, 그 바다로 나아갔던 개항기의 역사적 의의가 여기에 있었다. 

한국의 역사를 바다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노력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 활발해졌지만, 그 범위는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부터 남중국해 또는 동아시아 해역에 그쳤다. 태평양은 아예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것은 우리 학계의 해양사 연구가 아직도 근대 이전의 시기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근대로의 전환기 ‘아시아지중해(Méditerranée asiatique)’ 또는 아시아 ‘해역세계(maritime world)’에 대한 국외의 연구 성과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태평양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환태평양이라든가 아시아-태평양이라는 말들에 익숙해지고, 최근에는 인도-태평양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과연 우리가 스스로를 환태평양권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현실이 태평양을 매개로 한 한국인의 ‘세계’ 이해와 인식 틀에 대한 학문적인 검토를 소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한국은 원래 대륙국가 또는 대륙지향형 국가였지 해양국가는 아니었다는 통념화된 역사 인식 또한 바다에 대한 우리의 사고와 인식 지평을 제약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현재 남한은 대륙과의 연결이 차단된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태평양이라는 바다를 알게 되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세 단계로 나누어 살핀다. 첫 번째 단계는 조선 후기, 즉 임진왜란에서부터 개항 이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중국(명·청)으로부터 수입된 ‘서구식’ 세계지도와 지리서를 통하여 얻게 된 ‘상상의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태평양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다루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위정자나 실학자를 포함한 식자층의 바다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저조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바다가 아니라 대륙이었고 ‘땅’의 모양과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른바 지구설과 오대주설을 둘러싼 논쟁들이 그러했다.

두 번째 단계는 개항 이후부터 러일전쟁 발발까지이다. 이 시기 태평양에 대한 이해는 상상의 지리적 공간에서부터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미국과의 수교(1882)가 그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를 이루었다. 도대체 미국이란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이 지배층만 아니라 일반의 관심을 일깨우면서 태평양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이리하여 태평양은 조선인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자, 그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시에 서양 문물이 조선으로 유입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세 번째 단계는 러일전쟁 이후이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한국인의 대외 인식의 초점은 빠르게 대륙에서 해양, 특히 태평양으로 옮겨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조선시대 지배층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변방으로만 인식되던 ‘해국(海國)’ 일본의 부상이고, 그러한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고 한국의 독립 보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국가로 미국이 포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태평양은 이제 미·일간 패권 경쟁의 무대로서 한국인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태평양 위에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삼각점이 만들어진다. 서편 끝자락인 블라디보스토크, 동편 끝자락인 샌프란시스코, 그 한가운데인 호놀룰루이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가 제정러시아의 태평양 방면으로의 출구였다면, 샌프란시스코는 아시아에서 미주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호놀룰루는 미서전쟁(1898) 후 해양제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태평양을 그들의 ‘호수’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 세 곳에 한인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태평양을 둘러싼 미일 간 패권 경쟁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한국의 국권 회복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다. 그들은 고국으로부터의 추방과 망명자 의식을 공유하면서 자기들 사이에 하나의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동시에 국내 동포와의 연결을 시도했다. 그들은 ‘제국(帝國)’을 ‘민국(民國)’으로 대체하는 신대한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태평양은 삶의 현장이자 미래의 희망이었다. 

<태평양과 근대한국>에 대한 3부작을 집필 중인 저자는 이번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태평양은 고요하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늘 시끄러웠다. 어떤 때는 이 바다 때문에, 그리고 이 바다에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바다와 연결된 한반도 주변의 해역도 그러했고, 그러하다. 요즈음에는 인도-태평양이라는 말이 우리네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태평양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아니 무지하다. 내 자신이 그랬다. 이 책이 그러한 무관심과 무지에서 벗어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가까운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소란스러운 그 바다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정휴 포스텍·한국근대사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했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작년 여름에 퇴임하면서 『태평양의 발견-대한민국의 탄생』(국학자료원)이라는 강연록을 펴냈다. 이번 저술은 “태평양과 한국의 근대”를 주제로 한 3부작 중 그 첫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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