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소모의 ‘저주받은’ 가치를 복권하는 위반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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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소모의 ‘저주받은’ 가치를 복권하는 위반의 철학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8.08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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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 조르주 바타유 지음 | 최정우 옮김 | 문학동네 | 352쪽

 

바타유가 생전에 출간한 주저로는 『내적 경험』(1943), 『저주받은 몫』(1949), 『에로티슴』(1957)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그중 표면적으로 ‘정치경제학’을 표방한 『저주받은 몫』은 단연 가장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저서에 속한다. 바타유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소진/소모consumation’ ‘넘침/과잉exuberance’ ‘주권souverainete’ 같은 개념들이 문화사와 정치경제학, 인류학의 관점에서 비교적 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타유는 일반경제의 관점에서 “생명체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necessite가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인 ‘사치/과잉luxe’”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과잉의 에너지, 곧 부富의 ‘소진/소모’가 ‘저주받은 몫la part maudite’을 이룬다.

바타유는 생산/축적의 활동이 필연적으로 과잉을 수반한다고 본다. 즉 살아 있는 유기체는, 특히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축적한다. 이 에너지는 일정 시점까지는 어떤 체계(유기체부터 경제/사회 체제까지)의 성장에 사용되지만,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면 그 에너지의 과잉, 잉여분은 자발적이든 아니든 어떠한 이득도 없이 무용하게 상실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파국적인 전쟁은 이런 소진/소모 행위의 정점이다. 또한 과시적이고 경쟁적인 증여 행위인 북미 인디언 사회의 ‘포틀래치’(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증여 교환의 풍습)나 인신공희까지 이루어지던 고대의 희생제의도 유용성과 대비되는 무용한 소진/소모라는 맥락에서 고찰할 수 있다.

아무 이득 없는 소진, 완전한 파괴의 몫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둡고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며 그렇기에 언제나 회피와 제거의 대상이 된다. ‘저주받은’ 몫인 것이다. 생산/축적에 대비되는 소진/소모는 바타유가 『에로티슴』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논하게 되는 금기/위반과도 짝을 이룬다. ‘위반’은 ‘금기’를 전제할 때에만 유의미하며, 바타유에게 위반은 금기의 파괴가 아니라 금기의 완성이듯, 소진/소모는 단지 생산/축적의 거부가 아니라 생산/축적을 전제로 한 초월이자 위반이다.

책의 부제에도 등장하는 ‘일반경제’는 바타유에게 있어 ‘유용한’ 생산/축적뿐 아니라 소진/소모로서의 ‘무용한’ 소비, 낭비, 탕진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바타유는 때로 파괴와 상실로도 이어지는 무용한 소진/소모를 유용한 생산 활동과 더불어 인간성과 인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두 축으로 간주한다. 또한 이는 성聖과 속俗의 대립과도 연결된다. 생산, 축적, 노동, 소유 등은 일상적인 ‘속’의 세계에 해당하며, 반면에 종교, 희생, 낭비, 소진 등은 비일상적인 ‘성스러움’의 세계에 해당한다.

 

조르주 바타유

그러나 바타유의 관점에서, 순수한 탕진과 남김 없는 파괴의 몫, 비정상적인 ‘저주받은 몫’인 소진/소모 없이는 생산/축적이라는 정상성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저주받은 몫’이라 해도 단지 저주인 것만은 아니며, 비정상과 비일상 자체도 ‘일반적’인 것으로 수렴된다. 그렇기에 바타유의 사유는 역설의 반反철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책은 바타유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 문화사, 인류학, 철학, 문학, 예술, 비평이 혼종적으로 교차하는 잡종의 텍스트이다. 그중에서도 바타유가 코제브를 통해 학습한 헤겔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조르주 뒤메질의 신화학, 마르셀 모스의 인류학은 이 책의 주요한 원천을 이룬다. 물론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시점(1949년)의 시대적 배경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이 정체된) 세계화 시대의 종언을 나타내는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 바타유의 사유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바타유는 문화사, 사회사, 경제사의 다층적 맥락에서 아즈텍 문명과 북미 인디언 부족의 포틀래치,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통해 제국을 건설한 이슬람 세계와 티베트의 비무장 라마교 사회, 기독교 종교개혁과 자본주의의 결속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모두 낭비와 탕진이라는 순수한 소비와 소진/소모의 개념을 렌즈로 삼아 인간의 삶과 역사를 조망하기 위한 예시들이다.

바타유는 근본적으로 “세계에 노동이 도입되면서 그 즉시 노동이 인간의 내재성을 대체했다”고 말한다. 내재성은 주체가 그 자신과 동일한 것이 되는 주권의 상태를 뜻한다. 노동과 생산으로 대변되는 속俗의 세계에서 인간은 사물에 종속되고 물화物化된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아 헤매며, 온갖 신화와 제의, 종교적 세계는 그런 탐색의 산물이다.

노동과 생산에 예속된 노예상태의 인간이 일시적으로 주권적 내재성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소진/소모를 통해서이다. “주체는 노동에 속박되지 않는 한에서 소진/소모인 것”이다. 내재성의 경험은 언제나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재성의 경험은 곧 순수한 소비, 과잉과 넘침의 광기, 낭비와 탕진, 희생과 소진/소모, 파괴적 상실, 에로티슴, 신성의 경험이 된다. 이러한 주권적 경험은 오직 현재만을 생각하는 것이며, 이에 비해 생산/축적, 소유, 이성, 성장과 보존, 생식행위로서의 성행위, 노동과 사물, 속俗의 세계라는 일상의 경험은 현재보다 미래를 우선시하는 초월성에 의지하는 것이다.

바타유가 강조하는 ‘자기의식’은 “내재성에 대한 충만한 소유”이지만 그 충만한 소유는 결국 “속임수에 가닿는”다. 그렇기에 문제는 “의식이 더 이상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기를 그만두게 될 순간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성장(즉, 어떤 것의 획득)이 소비로 해소될 어떤 순간의 결정적인 의미를 의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확히 자기의식인 것”이다. 자기의식이란 무無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갖지 않는 의식이다.

바타유에게 주권적 자유란, 노예상태를 극복하여 도달하게 되는 상태가 아니라 무한히 예속을 반복하게 되는 인간의 무용한 한계 경험이다. 금기를 확인하는 순간적인 위반을 통해 절정에 도달했다가 다시 추락하기를 반복하는 한계의, 불가능성의 경험인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주권과 일상적인 노예상태, 성과 속의 이런 대립과 공존은 인간 삶의 본질이자 근원적인 에너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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