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 공화국에서 만 5세 입학이 필요한 게 아니야
상태바
선행학습 공화국에서 만 5세 입학이 필요한 게 아니야
  • 김귀옥 한성대학교·사회학
  • 승인 2022.08.07 1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평]

최근 독일에서 개최된 학술행사에 참여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우리의 일상이나 여행이 위협받는 속에서도 다녀온 터라 최대한 긴장을 한 채, 최소한의 동선으로 조심스럽게 다녔다. 야외에서 대다수의 독일 사람들은 거의 마스크도 쓰지 않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으려니, 오손이 마을에 간 육손이 같았다. 그럼에도 이제는 재외국민으로 정착하고 있는 독일의 지인 세 커플이 열어준 저녁 모임에는 반갑게 나갔다. 야외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라 내심 다행스럽기도 했다.

13년 만에 3시간여의 짧은 만남이나마 그간의 해우를 풀 수 있었다. 얘기의 후반부는 자녀 교육 문제로 흘렀다. 당시 처음 독일에서의 한 모임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들은 대개 학위를 마치면 귀국할 것이라 얘기했다. 그러나 현재 그들 모두 조만간 귀국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제1의 원인은 단연 자녀 교육 문제였다. 교육비 문제도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교육 환경 문제라고 했다. 한국에서 파견된 여러 기업이나 분야의 주재원들이나 특수한 목적으로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소도시에 많이 몰려 있고, 자연 인근 공립학교나 김나지움에 재외 한국인 어린이,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가 생겼다. 어떤 반에는 정원 20명에 7~8명의 한국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학교에는 과거에 없던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즉 선행학습이다.

사칙연산을 공부하는 데에도 1~2년 걸리는 독일 공립초등학교에 선행학습을 하는 한국 아이들의 경쟁 대상은 분명 한국에 있는 한국 학생들일 것이다. 특히 수학이나 영어 수업시간에 선행학습을 통해 혁혁한 암기 실력을 한국 아이들이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으로 평소 독일 교육 분위기를 좋아해 왔던 지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이들을 방치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며 마음이 착잡하다며 푸념했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왜 선행학습이 생기는지 한국 사람에게 선행학습 DNA라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은 더욱 착잡했다. 선행학습의 여파가 중·고등학생을 넘어 대학생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S대 한 과사무실로 어떤 학부모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의 아이가 그 과 1학년으로 입학했는데, 성적을 잘 받고 싶으니, 공부 잘하는 선배를 소개해 달라는 취지였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몇 년 전 광고 문구,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하네”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부모’와 ‘학부모’가 다른가는 차치하고라도, 학부모가 대학 교육까지 개입하는 아찔한 상황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정말 그런 얘기가 각 대학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어찌 보면 선행학습은 인간의 무한한 탐구욕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탐구욕은 인류를 숲에서 벗어나 문명을 건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고, 인간의 지식을 지구를 넘어 광활한 우주로 향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또한 선행학습과 유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사교육’은 근대 대중 교육이 도입되기 전부터 인류가 지식을 형성하고 계승할 때부터 존재해왔다. 다시 말해 공교육제도가 정착하기 전부터 사교육이 먼저 형성되어 왔기에 사교육 자체가 사악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교육이 공교육화되는 과정에 공교육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 예를 들면 여성, 장애인, 특수한 층에게 사교육은 필수적이었다. 즉 사교육은 공교육에서 배제 당했던 사람들을 위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의 일종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교육, 또는 선행학습이라는 방식은 탐구욕을 충족시킬 도구라기보다는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높은 점수, 더 좋은 학교와 직장, 더 많은 소득과 권력을 목표로 하는 도구이자, 차별과 불평등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것은 부모의 계급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될수록 선행학습과 사교육의 양극화는 능력주의와 결합하여 교육의 문제를 넘어 사회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사회 분열을 초래한다. 

선행학습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이나마 완화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하지만, 쉽지는 않다. 그러나 접근 가능한 대안은 대학 입학 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때마침 인구학적으로는 대학 입학정원이 학령인구보다 많아지고 있다. 다시 말해 최저 성적과 조건만 맞추면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식 대학 평등주의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프랑스는 교육혁명을 통해 전국의 대학들을 평등화하면서도 프랑스에 학력 저하가 되었다거나 우민화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학벌주의, 대학 서열주의, 지방대학 차별주의가 자리 잡은 한국의 상황에서는 대학 평등화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강하다. 1970년대 고교평준화를 시작하던 상황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고교평준화 때문에 외국어계열 고등학교, 과학인재양성 고등학교, 예술인 양성 고등학교 등과 같은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입학제도나 학교제도 아래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특수목적학교는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교비평준화 사회에서도 엄밀히 말해 언어 특성화, 예술 특성화, 과학 특성화 등 그 사회가 지향하는 특수목적학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목고의 등장 때문에 고교평준화를 되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지식기반사회는 특수한 엘리트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판적·성찰적 능력과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문해력을 보유한 보편적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대중 고등 인재가 더욱 중시되고 있다. 한국의 공교육이 이를 커버할 능력은 충분히 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 정책과 자본주의 교육 시장은 선행학습 공화국을 더 강화하려 하고 있다. 

21세기의 한국에서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은 계급 재생산의 수단이 되어버린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게 될 것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어느 드라마에 등장한 자칭 ‘어린이 해방본부 총사령관’이 외쳤던 “지금 당장 어린이는 놀아야 한다”, “지금 당장 어린이는 건강해야 한다”, “지금 당장 어린이는 행복해야 한다”라는 말이 귀에 맴돈다. 지금 당장 선행학습과 사교육을 멈춰야 한다. 또한 1등만이 살아남고, 모든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무한 경쟁의 문화도 멈춰야 한다. 지금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는 교육을 멈춰야 학생과 학부모가 행복해지고, 우리 사회도 행복해질 수 있다. 사교육에 방치된 사회에서 공공성과 평등성을 강화해야 한다. 공교육의 다양화, 인간과 자연의 공생 교육, 자기 계발과 상호 성찰, 소통과 협력, 배려의 교육을 위한 전환을 더 이상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김귀옥 한성대학교·사회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한성대 교양학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성대학교에서 학술정보관장, 민주평등사회를위한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약칭 민교협) 상임공동의장, 한국연구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사회학회 총무이사와 북한연구학회 부회장 등을 거쳤고, 현재 한국구술사학회 회장, 재외한인학회 부회장, 한국여성평화연구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새로운 인문사회 학술정책 거버넌스 구축과 과제』(공저, 2022), 『사회를 보는 새로운 눈 제3판』(기획 및 공저, 2021), 『촛불 이후 사회운동의 과제 및 전망』(공저, 2019),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2019)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