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료시스템에 깊이 각인된 제국주의와 노예제의 슬픈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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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료시스템에 깊이 각인된 제국주의와 노예제의 슬픈 그림자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8.01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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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주의와 전염병: 제국주의, 노예제, 전쟁은 의학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 짐 다운스 지음 | 고현석 옮김 | 황소자리 | 384쪽

 

의학은 18~19세기에 광폭으로 발전했다. 번성하는 제국주의의 관료체계 덕에 전 세계로 파견된 의사들은 시시각각 닥치는 의학적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로 변모했다. 넘치는 열정으로 유행병을 관찰하고, 감염자와 사망자 수를 세고, 주변 환경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던 그들은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다. 사례연구와 통계분석에 근거해 질병을 파악하고 예고하는 역학疫學 역시 이 시기에 탄생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공중보건의 시대가 첫발을 뗀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 시기 의사들이 대규모 임상을 진행하고, 예후를 관찰한 대상은 누구였을까? 당대 의학 혁명을 이끈 학자나 이론이 의학사의 중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것과 달리, 사례연구 현장에 관한 이야기는 말끔히 사라졌다. 이 책은 바로 그 현장, 의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기록이나 기억에서 삭제되어 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발굴해낸 역작이다.

당대 기준과 권력의 그늘에서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해 기존 역사 기록의 빈자리를 채워 넣고 있는 짐 다운스는 이 책에서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흑인과 혼혈인, 노예와 식민지 피지배인, 죄수와 군인들이 전염병 연구 및 역할 발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현미경을 들이대듯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예속된 사람들의 강요된 희생과 가슴 아픈 삶이 근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찬찬히 파고드는 이 책은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현실의 속살, 잘 포장된 외피 아래 우리 삶이 놓인 진짜 자리를 새로운 눈길로 들여다보게 한다.

책은 1756년 영국 군인들이 수용인원 초과 상태인 인도의 감옥에서 무더기로 죽어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극도의 갈증과 호흡곤란을 겪던 수감자 146명 중 살아서 석방된 사람은 23명에 불과했다. 훗날 ‘캘거타의 블랙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통해 의사들은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의 위험성을 섬뜩하게 인식했다. ‘신선한 공기’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의사들이 주목한 사례가 저 유명한 노예선 브룩스 호에서 토머스 트로터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였다.

당시 해군 군의관으로서 노예선에 배치된 트로터는 배 밑바닥에 짐짝처럼 부려진 노예들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에서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다 죽어가는 노예들을 관찰하던 트로터는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이 두 가지라고 판단했다. ‘더러운 공기’와 ‘영양 결핍.’ 노예들을 갑판으로 끌어내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고, 인근 섬에서 과일을 구해 먹이자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노예들의 건강을 보호해 ‘하자 없는 상품’으로 운송하라는 임무를 완수해낸 트로터는 이 경험을 살려 괴혈병 전문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정작 트로터는 논문과 저서에서 ‘아프리카 노예선’ 대신 ‘수많은 사례’나 ‘선박’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제국주의와 노예무역의 폭력성을 지워버렸다. 이렇듯 의사들이 자신의 연구에 도움을 준 대상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관행은 크림전쟁과 남북전쟁, 식민지에 산재한 일터에서 숱하게 일어났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1845년 말 서아프리카 해안의 작은 나라 카보베르데의 섬 중 하나인 보아비스타에서 유행병이 발생했다. 창궐하는 병을 두고 섬의 노예와 자유민, 섬을 통치한 포르투갈인, 아프리카에서 이클레어 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섬에 정박했던 영국인들 중 어떤 집단에서 질병이 처음 발생했는지 논란이 일었다. 질병의 책임이 영국에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대영제국은 해군 군의관 제임스 맥윌리엄을 현지에 파견했다.

젊고 유능했던 맥윌리엄은 질병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대부분 유색인종인 섬 주민 100명 이상을 인터뷰했다. 세탁부인 리모아, 마리안, 레오노, 요새 보초병 바르보사와 마노엘…. 그들은 병이 언제 시작되고 누구를 거쳐 어디로 퍼졌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치밀한 조사를 거쳐 맥윌리엄은 이 감염병이 황열병이며, 최초 질병 전파자는 이클레어 호에 승선했던 영국 군인이라고 결론지었다. 맥윌리엄의 보고서에 비중 있게 등장했던 보아비스타 주민들은 대영제국의 저널이나, 신문, 책에서는 핵심 정보 제공자로서의 위치를 잃었다. 어차피 본토의 권력자들에게 식민지 피지배인의 아픔이나 목소리는 스쳐 지나는 잡음에 불과했다.

책은 크림전쟁을 누비며 현대 역학의 기초를 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노예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남북전쟁에서 오히려 인종차별적 분류체계를 강화해 오늘날까지 질병을 인종 단위로 파악하는 악습을 만든 북부 의사들의 모순적인 활동, 19세기 중반 전 세계로 퍼진 콜레라 대유행 등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사회·역사적 변화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흥미롭게 탐색한다.

의사들이 사례연구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안다. 하지만 역학과 공중보건이 첫발을 떼는 단계에서 의료계가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전장의 포로들처럼 예속된 사람들의 고통에 얼마나 많이 빚졌는지를 체계적으로 밝혀낸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저자는 말한다. 제국주의와 노예제도는 현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의료시스템의 DNA에도 깊이 각인돼 있다고. 그렇다면 코로나19 팬데믹의 목격자이자 역학적 증거로 살아가는 우리의 목소리는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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