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바다라 말하고 사랑이라 듣는 언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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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라 말하고 사랑이라 듣는 언어의 힘
  • 류웅재 한양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승인 2022.07.24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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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다. 대학에서 일하는 중년 남성의 편견일 수 있지만 나는 <헤어질 결심>과 같은 영화를 더 자주 볼 수 있길 바란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소통과 관계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삶의 복잡성과 중층성을 자주 반추하는 계기를 갖길 소망한다. 주말에 학교 근처 한 극장에서 본 영화는 마블 시리즈나 넷플릭스의 수익창출에 최적화한 문화산업의 공식을 따르는 콘텐츠처럼 볼거리가 풍성하거나 대중성을 지닌 영화가 아니었지만 오래도록 긴 여운과 잔상을 남기는 수작(秀作)이었다. 함께 본 학생들 역시 이해하기 어렵고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들지만 아름다운 장면들과 훌륭한 연기가 좋았고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는 반응이 많았다.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 특히 대학에서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헤어질 결심>은 수사물이나 스릴러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진지한 로맨스 영화라는 점에서 유사한 정서를 지닌 일련의 미국 영화들, 가령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노트북>(Notebook), 라라랜드(LaLa Land)를 떠올리게 할 듯하다. 또, 전반적 톤이나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현대 영화사에서 고전이 되어버린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나 <카사블랑카>의 이미지를 드리우기도 한다. 한 예로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와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의 반전 있는 선택, 이를 결행하기 전의 수심에 찬 눈빛이 많이 닮아 있다.

영화에 대한 해외의 평가는 가디언의 5점 평점이 보여주듯, 느와르 로맨스, 교묘한 줄거리의 비틈, 히치콕스러움, 마스터피스, 현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 등 극찬 일색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가 영국 영화 <밀회>(1945)와 한국 영화 <안개>(1967)에 영향을 받았다 밝혔는데 특히, <안개>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밑그림으로 삼았다 알려져 있다. 오징어게임의 무진항 역시 안개가 상징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상, 불가해하고 예측이 어려운 오리무중(五里霧中) 같은 상황을 암시한다. 안개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동명의 곡을 통해 주요한 상징이자 정조로 기능한다. 이외에도 산과 바다의 대조, 같은 옷에 대해 푸른색과 청록색으로 보이는 시선의 차이 등 영화의 텍스트적 요소에 대한 비평이 양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영화의 백미는 사랑과 관계, 이를 매개하는 언어의 힘과 역할이 아닐까 한다. 일례로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란 대사는 용의자를 수사해야 할 경찰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붕괴시키고 사건을 영원한 미제로 남게 했다. 동시에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희생해 연인을 구하려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과정에서 대체 불가능한 강력한 고백의 언어로 치환되었다. 이해관계를 떠난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요즘처럼 혐오와 배제를 추동하는 정치적이며 전략적 언어가 우세종인 시대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분노와 저항을 매개하는 사이다 같은 말도 필요하지만, 이는 일시적으로 소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에 머무를 뿐 위장병을 근원적으로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킨다. 또한, 누구나 사이다 같은 말에만 몰두하면 이는 무기나 소음이 되고 만다. 오히려 삶의 주된 연료는 공기처럼 존재를 알기 어려운 사랑과 관용 같은 것이어야 한다.

두 주인공은 보통의 한국어 대화에서 보기 어려운 단어와 표현, 대체로 생경하고 비일상적인 언어(마침내, 운명, 단일한, 붕괴 등)를 쓰지만 서로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는 언어나 문화를 넘어 유대와 정동에 기반한 관계 맺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유학 시절, 일상의 대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나는 종종 문어체 표현을 애용하곤 했다. 영어를 책으로 공부한 늦깎이 유학생의 한계였지만, 미소를 띠면서도 이를 내색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던 지도교수와 동기들의 관대함은 영화 속 주인공의 그것을 닮아 있다. 이는 내게 증거를 인멸해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기기 위해 휴대폰을 ‘깊은 바다에 던져 아무도 못 찾게 하라’는 말처럼 팍팍한 유학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사랑의 말이 되었다.

언어를 포함해 미묘한 문화적 코드와 뉘앙스를 이해하고 활용하기 어려운 소수자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포용의 자세와 관대함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관용이라는 가치와 문화적 혼종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사랑의 언어는 소통과 관계의 일부이고 삶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비록 감독은 진지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라도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기도 하다.


류웅재 한양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한대신문 편집인 겸 주간, 한대교육방송국 주간, 한국방송학회 총무이사, 기획이사, 연구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장,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장, 한국언론정보학회 기획이사로 일하고 있다. 주 연구 주제는 방송 영상,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론, 문화산업, 문화정책, 문화연구, 국제커뮤니케이션이다. 저서로 <미디어 담론 연구>, <한류에서 교류로>(공저), <고어텍스와 소나무>(공저), <작은 문화콘텐츠 만들기>(공저), 역서로 <마르크스, TV를 켜다>(공역)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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