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어린 대담에서 발견하는 데리다의 삶과 철학적 진리
상태바
우정 어린 대담에서 발견하는 데리다의 삶과 철학적 진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7.11 06: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비밀의 취향 | 자크 데리다·마우리치오 페라리스 지음 | 김민호 옮김 | 이학사 | 213쪽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페라리스가 자크 데리다에게 3년에 걸쳐 사유의 경험에 대해 묻는 이 책은 프랑스어로 출간되지 못한 채 유실되었다가 데리다 아카이브에서 다시 발굴된 것이다. 주로 페라리스(와 바티모)가 묻고 데리다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대담의 내용은 사상가로서 무르익은 데리다의 자기 변론이기도 하고 인간으로서 완숙한 데리다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데리다는 위대한 서구 철학의 정전들을 가지고 정전적인 동시에 비정전적인 해명을 하며, 그 텍스트들의 사소한 대목들, 이목을 끌지 않는 문제의식들에 특히 관심을 쏟는다. 이 책의 현장감 있는 대화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 후설 같은 철학적 전통을 형이상학으로 규정하여 전복하는 데리다의 철학 활동과 그 생애사를 가감 없이 드러내준다. 독특성이나 발생, 정의, 죽음의 문제와 같은 데리다 철학의 여러 핵심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이 책은 데리다라는 철학자의 삶과 그가 지나온 연구의 궤적을 두루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 대담의 구절구절에서는 데리다, 페라리스, 바티모의 우정이 배어 나온다. ‘비밀의 취향’이라는 이 책의 제목부터가 데리다의 우정 개념과 맞닿아 있다. 데리다에게 우정이란 무엇보다도 비밀을 애호하는 취향이기 때문이다.

우정이란 서로 유사하거나 동등한 이들 간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 종종 소환되곤 하는 정념이지만 이 책에서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109쪽) 그의 말에 따르면 결국 사상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확실한 것은 우리가 서로 동등하기는커녕 우리 각자는 서로에 대해 전적으로 타자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을 위한 기본 원리를 사고하기 위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데리다가 보기에 공동체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침묵을 지키고 입을 다무는 것, 즉 우리 각자가 서로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다는 진리를 굳이 적시하지 않는 것, 그렇게 ‘비밀’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지탱된다. 이에 이 책의 후기에서 공동 대담자 페라리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데리다에게 솔직하고자 했다. 내가 아는 데리다라면 이렇게 솔직함을 공언하는 게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에게는 비밀을 애호하는 취향이 있었기 때문이다.”(203쪽) 솔직함에는 ‘비밀의 취향’으로서의 우정과 본질적으로 대척하는 면이 있는 탓이다.

모든 타자가 전적으로 타자임을 긍정하는 것은 그것을 소리 높여 고지하고 언표하는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고, 이로써 데리다는 여타의 급진적 타자성의 사상가들과 확실히 결별한다. 그러한 데리다에게 있어 우정은 친구에 대한 애호이기에 앞서 비밀에 대한 애호이고, 철학자는 단순히 진리를 밝히는 학자, 교설하는 사제, 전달하는 전령이기에 앞서 ‘진리의 친구’이다.

1993년 파리에서의 첫 번째 대담에서 데리다와 페라리스는 철학 안에 입장한 에크리튀르를 논하고 철학과 문학을 사유한다. 철학과 문학이 공유하고 있는 자연언어와의 밀착을 설명하면서 데리다는 한편에는 플라톤·데카르트·칸트·헤겔 등을 두고 다른 한편에는 호메로스·셰익스피어·괴테를 두는 집합들이 파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해 리조랑지스에서의 두 번째 대담에서 두 사람은 공동체에 관해 고찰한다. 알제리 출신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에 소속되는 것도 알제리에 소속되는 것도 프랑스에 소속되는 것도 문제가 되었던 데리다는 고전적 의미의 공동체를 의문시하며, 특정 공동체에 귀속되려는 욕망은 귀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1994년 파리에서의 세 번째 대담은 데리다의 자서전 요약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자신의 생과 철학적 사유를 두루 조망한다. 자전적 회고와 철학적 담론을 결합시키며 데리다의 궤적을 드러내는 한편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와 『산종』, 『철학의 여백들』, 『입장들』이라는 두 번의 삼부작 사이의 불연속성을 논하고, 해체와 정의, 비밀 개념에 관해 사유한다.

같은 해 나폴리에서의 네 번째 대담에서 페라리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언급하며 역사철학의 한계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데리다는 역사적 기억과의 단절과 철학적인 것의 관계, 고유명의 타자성에 관해 고찰한다.

다섯 번째 대담에서 데리다와 페라리스는 비밀에 관한 논의를 확장시키며 고해와 증언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리다는 언어적 전회의 한계를 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텍스트라는 개념과 그 지위를 논하고 시각의 특권에 대해 설명한다.

1995년 토리노에서 이루어진 여섯 번째 대담에서는 바티모가 등장하여 데리다와 페라리스의 대담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데리다는 저녁 식사 자리와 학술적 과업의 자리를 비교하면서 철학의 공동체에 대해 논하고, 이미지·모르페·에이도스·환상 등의 개념에 대해 사유한다.

마지막으로 페라리스는 우정 어린 후기를 덧붙여 이 책이 유실되었다가 다시 프랑스어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데리다와의 관계를 회고하며 일찍이 데리다 철학에 깊이 영향 받았으나 독자적인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페라리스 자신의 여정에 관해 이야기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