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동근원성과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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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동근원성과 긴장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7.1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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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12강_ 장동진 연세대 명예 교수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두 번째 섹션 ‘자유와 민주주의: 역사와 전개’ 제12강 장동진 명예교수(연세대 정외과) 강연 중 1장 ‘서론’과 5장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동근원성과 긴장’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동근원성과 긴장 


장동진 교수는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 삶의 중요성의 강조로부터 시작”하는 자유주의와 “사람들의 공동의 삶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민주주의 정치 원리는 “상호 의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또한 근원적 긴장성을 내포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와 같은 “자유주의 정치 이념과 민주주의 정치 원리 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19세기 콩스탕(Benjamin Constant)이 말한 “고대인의 자유(the liberty of the ancients)와 현대인의 자유(the liberty of the moderns)” 구분을 통해 접근한다. 즉 민주주의가 고대인의 자유에 빗대 “공적 문제에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평등성”을 출발점으로 하는 반면, 자유주의는 현대인의 자유와 맞닿아 있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구분은 또한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구분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 이념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해 살펴볼 때, 사적 자율성 보장으로부터 공적 자율성으로 확대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롤스(John Rawls)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의 절차적 민주주의 모두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정치 원리”가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평한다. 다른 한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 “긴장 역시 이론적으로 내포되어 있으며, 현실적으로 이러한 긴장들이 표현”되곤 하는바 자유주의로 인해 “민주적 안정성과 평등의 기반”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 정치”가 “정치권력의 폭력적 행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해보고 그 보호라는 것이 “제도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람들 특히 특정 사회의 국민들이 역사를 거쳐 오랫동안 습득하고 내재화된 상식적 규범이 살아 있을 때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전망한다. 

 

지난 6월 18일, 장동진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1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서론

우리는 흔히 일상적으로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와 별 차이 없이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또 양자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잘 조화될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또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자유주의 이념을 민주적 정치 원리를 통해 잘 실현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치 이론적으로나 정치 실천적 입장에서 긴밀히 들여다보면 양자 간의 동근원성(또는 상호 의존성) 및 친화성이 있지만, 동시에 긴장의 심각성을 감지할 수 있다. 자유주의를 간단히 말한다면,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 삶의 중요성의 강조로부터 시작되며, 민주주의 정치 원리는 사람들의 공동의 삶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개인의 삶의 중요성과 인간의 공동의 삶을 관리하는 문제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불가피하게 긴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상호 의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또한 근원적 긴장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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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동근원성과 긴장 

자유주의가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출발점으로 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공적 문제에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평등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콩스탕의 현대인의 자유와 고대인의 자유의 구분과 관계된다. 이러한 구분은 또한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구분으로 표현해볼 수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동근원성과 상호 의존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성을 내포하고 있다.

1)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 

자유주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개인들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래서 그 출발은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인데, 생명, 자유 및 재산으로 표현되는 소극적 자유가 그 중심 내용을 이룬다. 이것은 주로 개인 자신의 생활에서의 자율성을 국가나 정부로부터 보장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극적 자유만으로는 자신의 생활에서의 자율성을 보장받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확장은 정치권력의 강제성과 국가 능력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론이다. 정치적 자유 및 권리의 보장을 통해 개인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개인적 자율성을 더 적극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관념이 사회적·경제적 자유 및 권리의 보장, 문화적 권리, 심지어 환경의 권리로 확대되어나가는 것이 오늘날 자유주의 사회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소극적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적극적 자유 개념의 확장은 주로 정치적 자유의 행사를 통해 진전된다. 자유주의 이념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해 볼 때, 사적 자율성 보장으로부터 공적 자율성으로 확대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 이론과 현실적 헌법에서는 이 두 가지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기본권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콩스탕이 구분한 현대인의 자유와 고대인의 자유 모두가 이론 및 현실에서 기본적 자유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롤스와 하버마스의 정치철학 모두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정치 원리는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사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구분,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 또는 인권과 인민 주권의 관념을 상호 연결하여 하나의 이론적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2)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

① 자유주의에 대한 우려: 민주적 안정성의 기반을 위협

(a) 자유주의의 다양성과 다원주의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를 다원성과 자율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다원성은 각 개인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는 불가피하게 다원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각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판단, 종교적 신념 및 사상, 정체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표현된다. 자유주의 확산 및 심화는 다원주의의 확산 및 심화를 수반한다. 롤스는 이러한 다원주의 현실을 자유민주 사회의 영구적 특징으로 간주한다.

현대 자유민주 사회에서 사적 자유의 확대, 심화와 함께 (합당한) 다원주의의 현실은 기본적 자유의 보장과 공동선의 조화를 현실적으로 용이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이론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적정 조화의 지점을 찾는 것이 용이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찾는다 하더라도 이를 실천하는 과정은 더욱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합당한 종교적, 철학적 및 도덕적인 포괄적 교리들로 분열된 시민들 간에 정치적 관점에서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 지점을 찾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늘 포괄적 교리의 주장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고, 그래서 정치적 안정성을 현실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 않은 것으로 진단된다. 

(b) 경제적 민주주의의 정치적 평등의 위협

자유주의의 핵심인 개인의 기본적 자유의 우선성에는 소유권과 함께 경제적 행위의 자유도 포함된다. 소유권과 경제적 행위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입장은 특히 민주주의의 정치적 평등을 위협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소유권으로부터 출발해, 자발적 교환(free transfer)을 매개로 시장 자본주의 경제를 적극 지지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은 빈부 격차를 증대시켜 경제적 불평등을 구조화하게 되어, 민주적인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불평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든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자유의 평등성을 위협하게 된다.

 

②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

(a) 민주적 결정에 의한 자유의 함몰

민주주의 정치 원리가 최우선적 절대성을 지녔을 때 개인의 자유가 이에 함몰 예속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근본적 우려라 할 수 있다. 민주 정치를 통한 결정이 아무 제약 장치나 견제의 이념이나 가치가 없다면 민주 지상주의가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민주적 집단 결정을 통하여 함몰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콩스탕의 고대인의 자유 즉 인민 주권의 원리에 본질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현대인의 자유에 우선성을 부여하였을 때, 대두될 수 있는 위험이다. 따라서 현대 자유민주 국가에서 헌법 설계를 할 때, 민주적 결정의 독재성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법 재판소(constitutional court)나 연방 대법원을 통해 사법 심사제(judicial review)를 두어 민주적 결정의 위헌성을 검토하고 있다.

(b) 수에 의한 독재의 위험: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

민주 국가들에 있어 민주적 결정 절차 및 결정들은 헌법적 틀 내에서 설정되고 행사되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헌법적 제약 정치 내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적 결정 역시 언제나 다수의 횡포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정치적 결정은 모든 규범적 사항과 현실적 고려를 충분히 할 수 없는 긴급성과 제약성을 지닌다. 특히 현대 자유민주 사회의 다원성을 전제한다면 정치적 및 공적 사안에 대해 중첩적 합의를 도출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인간의 속성상 자기 이익 중심성 및 파당성을 스스로 자제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민주적 결정은 파당적일 수밖에 없고, 언제나 소수자의 의지가 정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억압될 수밖에 없다. 다수결 원칙은 이러한 근원적 불완전성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수에 의한 결정의 가장 위험한 점은 그 결정의 공적 타당성을 검증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적 결정에서 이러한 타당성 논의가 생략됨으로 인해, 다수결에 의해 패한 소수자들은 이러한 결정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c) 소유권 및 경제적 자유에 대한 위협

자유주의의 한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소유권의 인정과 함께 자유로운 경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이다. 오늘날 경제적 자유주의는 정당한 소유권의 절대적 보장을 근거로 하여 자유 시장경제와 함께 시장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하지만 시장 자본주의가 근원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구조화하고 영속화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의 평등한 보장을 위협하고 정치적 평등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자들 역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현하고 민주적 결정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

시장 및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 역시 결국은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역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 특히 민주적 결정을 통한 경제적 평등을 지향할 때, 그 타당한 균형점을 찾는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민주적 결정을 통해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려 할 때, 우리는 비탈길 논변(the slippery-slope argument)의 반론에 직면한다. 우리가 평등을 실현하고자 할 때, 우선적 관심을 두는 것은 사회적 우연성을 조정하는 것이다. 만약 국가가 사회적 우연성을 성공적으로 통제하였다고 가정해보면, 다음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뛰어난 유전 인자로 인해 사회의 혜택을 누리는 상위 계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등이 자유보다 우선적 가치라면, 왜 이러한 자연적 우연성에 따른 불평등을 국가가 제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비탈길 논변의 요지이다. 이것은 자유와 평등 간의 적정 균형점을 찾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용이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6. 맺음말: 우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어떤 결합을 원하는가? 

민주주의 정치 원리와 자유주의 이념의 발달은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동기와 무관하지 않다. 자유주의는 분명 개인의 중요성과 함께, 자의적 정치권력의 행사로부터 개인의 생명, 재산 및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민주주의 역시 민중이 독재(tyranny)나 부자들의 착취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동근원성을 공유한다고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현대 자유민주주의 또는 입헌 민주 정치에서 자유주의 이념과 민주 정치의 원리가 서로 얽혀서 또는 융화되어 하나의 정치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융합은 서로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내적 긴장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언제나 환경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아주 축약하여 말한다면,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는 자유이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는 이 양자를 실천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이론적 기획 및 실천적인 제도적 장치들은 언제나 미완성이며 한계와 결함을 안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정치 원리 역시 이론적으로 미완성이며 또한 실천적 문제와 한계를 안고 있다. 자유주의 이념과 민주 정치 원리는 자체의 한계를 지닌 불완전한 정치이론이다. 이 양자의 결합 역시 완벽할 수 없다. 언제나 긴장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양자가 결합된 정치가 다른 대안적 정치 방식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는 강점이 있다. 정치적 이상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누가 결정하여야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민주 정치 원리는 기본적으로 개인 당사자들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자유주의 정치 이념은 개인의 자유를 발휘하고 보호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

자유민주 정치 또는 입헌 정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든 자유주의 이념과 민주주의 정치 원리가 결합된 형태를 띠게 된다. 그 구체적 구성은 각 나라마다 역사적 경험, 정치적 전통과 문화, 경제적 여건 및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배경적으로 받아 그 고유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지만, 그 제도적 구성은 상당한 불완전성은 물론 다양한 해석 및 운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어느 나라의 정치이든 기본적으로 그 국민과 정치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그 사회의 운영 성격 및 방향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정치적 효능과 결과는 구체적으로 제도적 성격과 시민 및 정치 지도자의 역량의 결합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레비츠키와 지블랫(2018)의 제안은 자유 민주정체 및 한국 민주 정치 운영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지어 잘 고안된 헌법들조차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없다. . . 민주 정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중심으로 한 명문화된 제도와 규칙들이 중요하지만, 명문화되지 않은 규칙들도 중요시해야 한다. 민주 정치를 운용할 때 가장 근본적 두 가지 규범은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이다. . . 상호 관용은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정치인들의 집단적 자발성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제도적 자제 역시 민주주의의 생존에 결정적인 규범이다. . . 제도적 자제란 법의 엄격한 문구를 준수하면서도 명백하게 법의 정신을 위반하는 행위들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역시 유사한 제안을 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자유주의와 그 불만들』(Liberalism and Its Discontents, 2022) 10장 말미에서 자유적 사회를 위한 최종적 일반 원칙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연극 각본으로부터 의미 있는 “과함이 없는 것(nothing in excess: mēden agan)” 또는 “중용(moderation: sophrosumē)”의 개념을 빌리고 있다. 중용은 자신의 내적 자아에 대한 인위적 제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소위 내적 자아의 완전한 발현이 인간 행복과 성취의 근원이라고 말하여지기도 한다. 때로는 성취란 한계를 수용하는 데서 올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공동생활에서나 중용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소생과 생존에 핵심이라 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현재 한국 민주 정치를 운영하는 데 있어, 법적으로 명문화되지 않은 규범들을 준수하고 우리의 문화에 내재해 있는 중용이나 양보, 겸양과 같은 훌륭한 규범들을 존중하는 것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것 같다. 

시민과 정치인 모두 민주적 결정에 대한 자제의 원칙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시민은 공직자 및 대표들에게 공적인 관점에서 정치적 결정에 임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자신의 파당적 및 분파적 이익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시민들 모두 공적 이성(public reason) 또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 공적 문제 결정에서 요구된다. 이것은 롤스의 원초적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정치적 합의의 기초가 되는 상호성(reciprocity)을 전제한다. 한편 하버마스 이론에서 의사소통적 이성과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의사소통 권력을 행사할 때 요구되는 담론 원칙의 조건들 그리고 민주적 결정을 할 때 요구되는 민주적 원칙은 이러한 정치인과 시민들 모두가 공적 결정에 임할 때 요구되는 지침이다.

정치권력은 언제나 유혹적이고 그 행사는 폭력을 수반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 정치 양자 모두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력적 행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권력을 통제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은 제도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것은 사람들 특히 특정 사회의 국민들이 역사를 거쳐 오랫동안 습득하고 내재화된 상식적 규범이 살아 있을 때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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