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자유론: 초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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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자유론: 초연의 자유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6.27 0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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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강연]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9강_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의 「불교의 자유론: 초연의 자유」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첫째 섹션 ‘자유의 이념과 지향’ 제9강 한자경 교수(이화여대 철학과)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초연(超然+超緣)의 자유:
자연(개체적 본성)과 인연(전체적 관계)을 넘어서는 절대 평등의 자유 고찰 


한자경 교수는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서구 근대에 비로소 확립된 개념으로만” 여기고 있으며 “개념이 그렇다는 것은 서구 근대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알지도 못했고 추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라고 할 수 있는데, 정말 그런지 의문을 제기하며 “오히려 서구 근대에 탄생한 개인주의적 자유 개념만을 자유로 알고 그 이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질문을 던진다. 좀 더 물음을 예각화해, 서구에서 자유를 둘러싸고 오랜 기간 논쟁의 축을 이뤄온 “개인주의도 아니고 공동체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은 과연 없는 것일지 묻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의 대안으로 불교에서의 자유를 제시하며, 이사야 벌린이 말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중 어느 하나가 아니”고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개체적 본성인 자연도 사회적 관계인 인연도 아니”라고 답한다. 요컨대 “표층 현상 세계 속 각각의 존재를 각각의 본성을 갖는 자연이라고 여기면서 자연으로서의 나에 집착하는 것”, 그리고 “표층 세계 전체를 서로 상호 의존 관계로 얽혀 있는 인연이라고 여기면서 전체 관계성 속의 나, 인연으로서의 나에 집착하는 것”, 이와 같은 집착들을 모두 떠나는 것이 바로 불교가 바라보는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지난 5월 28일, 한자경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서구 근대에 비로소 확립된 개념으로만 여긴다. 개념이 그렇다는 것은 서구 근대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알지도 못했고 추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서구 근대에 탄생한 개인주의적 자유 개념만을 자유로 알고 그 이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유주의(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의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상가들을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난제 중의 하나이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입장 차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두 대립항, 나와 세계, 부분과 전체, 개체와 관계, 둘 중 어느 것을 더 우선시하는가의 차이이다. 둘을 대립으로 놓으면, 하나가 올라가면 다른 하나가 내려가기 마련이다. 나와 세계, 부분과 전체, 둘을 모두 살리는 길이 과연 있을까? 개인주의도 아니고 공동체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신자유주의(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 과연 있을까?

이는 두 항 중 어느 하나를 취하거나 두 항을 모두 취함으로써가 아니고, 두 항을 모두 버림으로써 가능하다. 인간은 자유주의가 생각하듯 타존재와의 일체 관계성을 탈각한 채 자기 욕망만 충족시키면 되는 그런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동체주의가 생각하듯 타존재와의 상호 의존 관계에 얽매인 채 공동체적 질서에 의해 삶의 방식을 규정받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과연 얼마만큼 자유로운 존재인가? 이와 같이 자유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불교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할까?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또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인가? 

 

2.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free from)’와 ‘...를 할 수 있는 자유(free to)’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이사야 벌린은 「자유의 두 개념」(1958)에서 이 둘을 각각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칭하며, 소극적 자유를 ‘...로부터의 자유’로서 내가 외부 간섭 없이 내 뜻대로 나의 인생길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로, 적극적 자유를 ‘...를 할 수 있는 자유’로서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유, 즉 내적 욕망에 이끌리지 않고 진정한 자아, 자율적 자아로서 행위하기를 원하는 ‘자치(자율)의 자유’로 풀이한다. . . . . .

자유주의(개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에 앞서 개인으로 존재하고, 사회(국가)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서로 간의 계약으로 만든 장치에 불과하다. 여기서 자유는 개인 각자가 외부 간섭 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심을 끝없이 분출할 수 있는 자유, 모두가 경쟁하여 자기 이익을 무제한으로 쟁취할 수 있는 자유, 한마디로 돈 벌 수 있는 ‘경제적 자유’이다. . . . . .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자유주의가 전제한 개인주의로 향하며, 결국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개인주의의 대안으로 공동체의 덕과 규범과 문화 등 공동선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가 등장한다. 그러나 개인보다 공동체를 앞세우는 공동체주의는 자칫 개인을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으로만 간주함으로써 전체주의나 집단주의로 변질될 수 있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며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벌린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결국 인간의 핵심을 무엇으로 보는가, 개인의 욕망인가 아니면 공동체적 관계인가의 문제가 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우선시하므로 공동체적 질서를 외적 강제로 간주하고,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적 관계를 우선시하므로 개인의 욕망을 극복해야 할 내적 강제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딜레마적 상황을 연출할 뿐, 인간 존재 및 자유에 대한 총체적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불교에서의 자유는 벌린이 말하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중 어느 하나가 아니다. 불교는 개인주의도 공동체주의도 아니고,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개체적 본성인 자연도 사회적 관계인 인연도 아니다. 불교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관점을 제시한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연과 인연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가는 불교는 과연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3. 불교의 무아설과 탐진치의 극복: 자유주의(개인주의) 비판

자유주의의 바탕이 되는 개인주의는 나를 개체적 자아, 개체적 본질을 가진 나로 간주한다. 내가 꼭두각시가 아니고 자유로운 인간이려면, 나를 움직이는 나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런 의지를 가진 나가 있어야 한다. 남들과 다른 나, ‘나는 나다!’의 나가 있어야 한다. 일체의 외적 관계를 탈각한 개별적 나, 일체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나, 삶의 방향과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개별적 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그러한 나의 본질을 욕망으로 파악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인데,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그 욕망이 바로 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욕망에 대한 절대 긍정이 자유주의 내지 개인주의의 특징이다. 다만 나의 욕망 실현이 다른 사람의 욕망 실현과 부딪치면서 상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그런 충돌을 조종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국가가 그 역할을 담당하면 된다. 그러한 사회적 규범에 맞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자유주의 내지 개인주의가 추구하는 바이다.

불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자유주의(개인주의)와 구분된다. 첫째, 불교는 기본적으로 ‘무아(無我)’를 주장하며, 남과 구별되는 개별적 자아, 개체적 본질을 갖는 자아, ‘나는 나다’라고 생각되는 개별적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한다. 둘째, 불교는 인간의 욕망을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본질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을 구속하는 강제로 간주한다. 사회적인 외적 강제뿐 아니라 내면의 욕망도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내적 장애로 여기는 것이다. . . . . .

 

4. 불교의 연기설과 절대 평등의 심층 마음: 공동체주의 비판

공동체주의는 인간을 그가 속하는 공동체 내에서 다른 존재와의 상호 의존 관계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부여받는 존재로 이해한다. 공동체적 덕과 질서를 강조하며 그 질서 안에서 다른 존재와 조화롭게 관계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개인의 자유도 그러한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실현된다고 본다. 불교는 일체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인연 화합의 연기를 논한다는 점에서 개인보다 공동체의 우선성을 논하는 공동체주의의 통찰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두 가지 관점에서 공동체주의와 구분된다. 첫째, 불교는 인간을 공동체적 질서나 관계에 따라 각자의 정체성, 삶의 위치나 역할이 규정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불교는 일체 존재가 상(相)의 차이를 따라 드러나는 ‘분별적 현상의 차원’과 일체 존재가 현상적 분별을 떠난 공(空)으로, 상 너머 성(性)으로 드러나는 ‘무분별적 심층의 차원’을 구분한다. 공동체주의가 인간을 공동체의 상호 관계성에 따라 규정되는 표층적 현상 차원의 존재로 이해하는 데 반해, 불교는 인간을 표층의 현상적 차이 너머 심층의 공과 일자성(一者性)의 존재로 이해한다. 이처럼 표층 너머의 심층, 현상 너머의 공과 일자를 논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공동체주의와 구분된다. 둘째, 불교는 그러한 상 너머의 성, 공성과 일자성을 추상적 우주 원리나 이치 또는 인간 너머의 외재적 신(神)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든 인간 내면의 심층 마음,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마음으로 논한다. 이처럼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 마음, 우주적 마음, ‘일즉다다즉일’의 마음, ‘절대 평등’의 마음, 일심(一心)을 모든 인간 내면의 심층 마음으로 논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개체를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전체의 일부분으로만 간주하는 공동체주의와 구분된다. . . . . .

 

5. 불교적 자유

1) 깨달음의 자유: 무아와 일심의 자유

불교는 개인주의(자유주의)가 아니다. 불교에 따르면 개별적 자아는 단독적 자아로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고, 인간의 탐진치의 욕망은 인간을 부자유하게 속박하는 장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공동체주의인 것도 아니다.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표층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고, 현상 전체를 품은 일자의 자각성, 본래적 각성인 공적영지를 갖는 심층 마음, 일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교는 인간의 실상을 개인주의가 말하는 개체적 본성(자연)도 아니고 공동체주의가 말하는 공동체적 관계(인연)도 아닌 제3의 지점, 초연의 지점으로 밝힌다.

무아인데 어떻게 일심일까? 무아는 개별 자아가 서로 대대 관계를 이루는 표층에서 성립하고, 일심은 모든 마음이 하나로 통하는 심층에서 성립한다. 무아의 깨달음을 통해 표층의 아집이 깨져야 심층의 한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표층의 자아가 무아임을 깨달아야 심층의 일심을 자각할 수 있다. 꿈속의 나가 내가 아님을 알아야, 꿈속의 나가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내가 없게 되는 순간, 무아가 되는 순간이 곧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순간이다. 즉 무명(無明)을 벗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인생의 긴 꿈, 표층 분별 의식 속에서 표층 현상 세계에 매여서 사는 인생의 긴 꿈을 깨우기 위해 무아를 설한다. 현상의 일체 상이 사라진 결과, 일체 집착과 번뇌가 사라진 결과가 단순히 공이고 단지 적멸일 뿐이라면, 그것은 악취공(惡取空)일 뿐이다. 꿈을 말하고 꿈에서 깨어남을 말하는 것은 곧 꿈을 벗어난 경지, 일체 상을 여읜 경지, 열반의 경지, 무애의 경지, 자유의 경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꿈에서 깨어나 마음 본래 자리에 들어서는 것, 심층 마음, 일심의 본각을 확인하는 것,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 일체 중생이 모두 그 마음 본래 자리에서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확인하는 것, 그래서 대자대비의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가 지향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명의 장애를 벗는 것이 바로 무애의 경지, 자유의 경지이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자유, 초연의 자유이다. 자연과 인연 너머 초연한 본래의 마음자리, 일심의 자리에서 나와 너, 나와 세계를 분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2) 요익중생(饒益衆生)의 길: 현상에서 공정한 자유의 실현

깨달음을 얻어 현상 세계에 대해 초연해진다면, 그럼 현상 세계의 나 그리고 나의 이웃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갖게 될까? 심층 마음인 일심을 자신의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심층에서 일체 중생과 본래 하나라는 것,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고, 우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불이(不二)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심층 마음의 깨달음, 불이의 깨달음은 너와 나의 차이를 넘어서게 하고 너와 나의 장벽을 허물기에 사람 사이의 공감 능력을 확장시킨다. 그 결과 다른 인간의 번뇌가 곧 내 번뇌가 되고, 다른 중생의 고통이 곧 내 고통이 된다. 그렇게 지혜의 마음은 자비로 나아가며, 이런 자비의 마음이 곧 보살의 마음이다. 보살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두루 이익되게 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이타행을 행하여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꾀한다. . . . . .

어떤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 공정한 세상일까? 인간은 표층 현상에서 그 모습인 상(相)이 아무리 서로 다를지라도 그 심층의 성(性)에 있어서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누구나 심층 마음의 자유를 누리면서 구체적 현실을 살아갈 권리를 가지는 절대 평등의 존재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는 먹고 입고 자야 한다. 그러므로 생존의 기본조건이 바로 돈이 된다. 인간 사회에서는 돈을 어떤 방식으로 취득하고 어떤 방식으로 분배하는가의 경제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재화를 성취해야 하는 걸까? 어떤 방식이 부의 공정한 배분 방식, 정의로운 배분 방식일까? 공정하자면, 행한 만큼 받는 것이 맞다. 그것이 인과의 원리이고, 불교에서는 이것이 업보(業報)의 원리이다. 업을 지으면 그 결과만큼 보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불교는 기본적으로 무아를 논하니, 불교의 업보 또한 무아(無我)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연결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업과 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유업보 무작자(有業報 無作者)”이다. 인간은 단독적인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기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도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행위는 모두가 함께 짓는 공업(共業)이 된다. 불교의 “유업보 무작자”는 우리가 하는 행위, 업은 모두 개별자 단독의 업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짓는 공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일체가 공업이기에 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 또한 모두가 함께 받아야 할 공보(共報)이다. 무아이므로 공업이고, 공업이면 당연히 공보이다. 공보는 공통의 보를 말한다. 선업과 악업이 우리가 모두 함께 짓는 업인 만큼 락과(樂果)와 고과(苦果)도 우리가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할 모두의 몫, 공통의 몫이다. 고와 락의 나눔, 재화의 나눔이 불공정한 사회라면, 그 속에서 내가 웃고 있는 것은 곧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울고 있다는 것을 말고, 내가 행복해하고 있는 것은 곧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이러한 공업과 공보의 원리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처음부터 무아를 주장하고, 무아는 곧 우리가 모두 표층의 현상적인 개별적 차별상 너머 심층에서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로 소통하는 하나의 마음, 일심(一心)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심층 일심에 기반해 보면, 현상의 중생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공생공멸의 운명 공동체이다. 국가는 시민 모두의 의식주의 기본 생존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심층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3) 자연과 인연을 넘어선 초연의 자유

불교에서 자유는 심층 마음의 본래 자리에 존재한다.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내적 번뇌, 탐심과 진심의 장애를 벗어남이고, 궁극적으로는 무명의 장애를 벗어남이다. 즉 표층의 현상 세계가 꿈과 같은 가상임을 알아 심층의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일체의 장애로부터 풀려나는 초연함이 곧 자유이다. 표층 현상 세계 속 각각의 존재를 각각의 본성을 갖는 자연이라고 여기면서 자연으로서의 나에 집착하는 것, 표층 세계 전체를 서로 상호 의존 관계로 얽혀 있는 인연이라고 여기면서 전체 관계성 속의 나, 인연으로서의 나에 집착하는 것, 이런 집착을 모두 떠나는 자유이다. 자연도 아니고 인연도 아닌, 자연도 넘어서고 인연도 넘어서는 초연의 자유이다.

이 자유는 객관화하여 대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대상을 보던 자아를 회광반조함으로써 스스로 자증(自證)으로만 알 뿐이다. 자유가 자리한 심층 마음 자체가 객관화와 대상화를 넘어선 자리이기 때문이다. 대상화되어 포착되는 자아는 표층의 현상적 자아이지, 심층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층 마음의 자유는 대상화를 통해 증명될 수 없다. 심층 마음의 자유는 내가 실제로 스스로를 심층 마음으로 자각함으로써 느끼는 자유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현상 너머의 존재라는 것, 일체의 규정성을 넘어선 비규정적 존재라는 것, 심층 마음에서는 나나 너가 일체 분별을 넘어선 하나라는 것을 직감으로 안다. 누구나 본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논하는 심층 마음의 초연의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개인은 자유주의가 말하듯이 자타 분별의 개인, 각각으로 흩어져서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욕망의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인 절대 평등의 개인이다. 초연의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들 간의 상호 관계도 내가 그 관계망 중의 어느 한 항에 고정되어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인간의 상호 관계 전체가 실은 내 안에서 함께 작동하고 있는 관계인 것이다. 나는 전체 허공이지 허공 중의 한 점이 아니고, 전체 광야이지 광야를 달리는 한 마리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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