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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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논하다
  • 김지현 기자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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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나날과 『논리철학논고』의 탄생[리커버 에디션] | 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지음 |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512쪽

 

세기 말 빈이라는 역사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철학사에서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가 ‘세계 파괴의 실험장’ 세기말 빈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토양 속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밝혀낸 저작이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문장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끝맺는 마지막 명제이다. 사람들에게 이 문장은 형이상학적 철학을 배척했던 논리실증주의의 논조를 대표하는 경구로 유명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논리실증자로 불리기를 거부했고, 스승 러셀이 써준 서문을 읽고는 책을 폐기하려고까지 했다. 우리는 과연 앞의 경구와 『논리철학논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의도했던 바와 다르다면 어떨까?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카를 크라우스가 ‘인류 최후의 날’로 풍자했던 19세기 말의 빈은 신흥 부르주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질서가 충돌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이 들끓던, 유럽 사회의 계급적, 민족적, 인종적 모순의 집결지이자 모더니즘 탄생기의 꿈의 도시, 천재들의 놀이터였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정신분석학이 탄생하고, 통계열역학의 아버지 루트비히 볼츠만과 감각경험론의 에른스트 마흐, 쇤베르크의 12음계 작곡과 무조음악, 로베르트 무질의 모더니즘 문학과 일체의 장식을 거부한 아돌프 로스의 모더니즘 건축이 빈에서 탄생했다. 브람스와 말러, 멘델스존과 요하임, 클림트, 부르노 발터가 드나들었다던 비트겐슈타인家는 바로 그 빈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에 있었던 신흥 부르주아의 대표 가문이었다.

저자들은 어떻게 한 도시에 이렇게 거대한 지성과 예술의 소용돌이가 들끓고 있었는지, 이러한 시대적 격랑 속에 던져진 예민한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동시대의 지성들과 공유했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하여 『논리철학논고』라는 한 천재의 작품 속에 그 시대의 정수가 어떻게 녹아들어갔는지를 세기말 빈의 정치, 사회, 문화, 예술, 과학 등 각 분야의 천재들의 향연 속에서 분과 학문들의 경계를 넘는 탁월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세밀히 밝혀낸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대적 문제의식을 반영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러셀을 비롯한 영어권 철학계에서 어떻게 오해되었는지를 밝힘으로써, 『논고』에 나타난 논리적 비트겐슈타인과 윤리적 비트겐슈타인의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을 더 높은 관점에서 통일하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저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순수철학의 전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언어분석적 관점으로 보는 표준적인 해석을 탈피하여, 세기말 빈이라는 역사 공간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을 포착한다. 19세기 말 빈의 정치, 문화, 예술, 과학, 언론, 건축 등 여러 분야와의 연결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삶과 철학을 넓은 맥락 속에서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동안 영미 철학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논리학과 언어분석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 해석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윤리적인 면모를 천재 철학자의 괴팍한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했다. 이 책은 이러한 정통적 해석과는 달리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가졌던 철학적 문제의식을 보여줌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으로 끝맺는 『논고』의 난해한 내용을 한 천재 철학자의 윤리적 괴벽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의식에 민감하게 반응한 실존적 고뇌의 산물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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