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신냉전, 배신과 기만의 샌프란시스코 조약 70년 역사를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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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과 신냉전, 배신과 기만의 샌프란시스코 조약 70년 역사를 조망한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5.30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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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동아시아 냉전과 식민지·전쟁범죄의 청산 | 김영호·이태진·와다 하루키·후더쿤·알렉시스 더든 외 1명 지음 | 메디치미디어 | 724쪽

 

202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된 지 70년째가 되는 날이다. 1952년 4월 28일, 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되면서 일본 주둔 연합국군 총사령부는 점령 통치를 끝내고 일본국에 주권을 돌려주었다. 전범국가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또 다시는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농업국가로 개조하겠다던 연합국의 목표는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 세계적인 냉전의 시작을 계기로 후퇴하였다. 

전쟁범죄·식민지범죄의 추궁을 면제받은 일본은 관대한 조약 내용에 만족하였고, 이후 미국과 함께 아시아·태평양 반공 동맹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이 책은 동아시아와 대한민국을 70년 동안 옥죄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동아시아 냉전을 오래 연구한 세계적인 역사학자들과 역사, 법, 국제조약, 국제정치 등 여러 차원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문제점을 연구한 한국 학자들의 성과를 모았다.

1952년 4월 28일. 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종전 처리를 위해 전년도 9월 8일에 일본과 48개 연합국 사이에 조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었다. 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되면서 일본 주둔 연합국군 총사령부는 점령 통치를 끝내고 일본국에 주권을 돌려주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출발부터 한계가 많았다. 전쟁을 결산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연합국의 중요한 동맹이었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 어느 쪽도 초대받지 못했고, 역시 중요한 동맹이었던 소련은 조약의 내용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서명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이자 연합군의 일부로서 참전하였던 한국을 초대하고 싶어 했지만, 일본과 영국 등의 반대로 결국 한국은 초대받지 못하였다. 소련이 반발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조약 내용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엄격하게 묻지 않고 넘어가는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전범국가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또 다시는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농업국가로 개조하겠다던 연합국의 목표는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 세계적인 냉전의 시작을 계기로 후퇴하였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대일 강화 7원칙이 일본의 예상보다 “의외로 관대한 것”이라며 용기를 얻었다고 썼다. 전쟁범죄·식민지범죄의 추궁을 면제받은 일본은 조약 내용에 만족하였고, 이후 미국과 함께 아시아·태평양 반공 동맹의 주역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냉전은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고 동지가 적이 되는, 그러한 ‘동맹의 역전’과 함께 시작하였다.

2022년 4월 28일, 70년 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하면서 형성된 샌프란시스코 체제, 동아시아 냉전 체제도 70년을 맞는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이 평화조약으로 말미암은, 또는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 그리고 그것이 관련 당사국들의 정치·군사·외교·안보·경제의 작동방식을 좌우하거나 거기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관계망 전체를 가리킨다.

최근 위안부 피해자와 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에서 내용 해석을 둘러싸고 쟁점이 되고 있는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과 한·일 청구권협상 등도 역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틀 안에서 맺어진 협약들이다. 역사청산(식민지범죄, 전쟁범죄의 청산)과 영토분쟁 등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한·일 갈등은 이처럼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조약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만들어낸 갈등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패전국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고 단죄하고 배상하게 하고 재발 방지책을 강구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 조약을 준비하고 체결에 이르는 기간은 바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미국은 1947년의 ‘트루먼 독트린’과 1949년 중국공산당의 중국 국공내전 승리 및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거치면서 미국 등 서방세계가 경계감을 높여 오던 사회주의세력 팽창 저지라는 동서냉전 정책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범국 일본을 단죄하기는커녕 거꾸로 일본의 전쟁범죄를 눈감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폭적인 군사·경제 지원을 통해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상의 최대 동맹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근대 이후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남북한과 중국은 일본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책임을 묻고 배상을 요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남북한과 중국(대만과 베이징 모두)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 초청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데 거기에 참여하지도 못한 남북한과 중국 등이 그 조약의 규정 조항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역사청산과 영토분쟁 문제에서 일본이 주장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책은 시기적으로는 청일전쟁에 대한 재검토(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위해 미 국무부가 작성한 준비문서를 보면, 미국은 1947년 초안에서는 일본 영토를 1894년 1월 1일 이전으로 복귀시키고자 했다. 즉 청일전쟁이 영토반환의 한 기점이 되는 것이다)부터 시작해서 고종의 을사늑약 무효화 투쟁 등을 거쳐 최근의 일본 오키나와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의 문제나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 또 한국의 위안부 및 징용자 소송에까지 살펴보고 있다. 즉, 1894년부터 2022년까지의 동아시아 역사를 반성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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