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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정 창원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5.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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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50년 가까이 동서고금의 철학들을 읽고 쓰고 가르치고 하면서 마치 깨달음처럼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의 학문분과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생적(生的) 요소의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구체적인 텍스트들이 쓸데없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언어가 우리들의 삶에서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단순화’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의 언어들 중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 ‘작용’하는 사례들을 보면 곧바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너 자신을 알라” “나는 인간을 찾고 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아는 것이 힘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얼굴이 달라졌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신은 죽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상급의 선은 물과 같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 기타 등등. “회개하라/용서하라/사랑하라” “가세 가세 건너가세 모두 다 건너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세(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도 마찬가지다. 이런 류의 단순한 철학적 언어 한마디가 갖는 위력을 어느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 한마디가 벌려놓은 ‘각도’라는 것을 보통 잘 알지 못한다. 이런 한마디의 말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 대해, 타인들의 삶에 대해, 국가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사르트르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며, 그 선택은 어떤 ‘각도’를 벌려놓는 것이다. 그 각이 단 1도라 해도 거리가 멀어지면 그 각은 점점 크게 벌어진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지금의 1도가 10년 후 100년 후에는 완전히 다른 어떤 지점을 만들게 된다. 그것은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보다 더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런 류의 어떤 선택, ‘각 벌리기’는 저 철학자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금 여기(hic et nunc), 즉 21세기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 아니 더더욱 필요하다. 왜냐면 지금 이대로는 좀, 아니 너무 곤란하기 때문이다. 문제들이 너무 크고 너무 많다. 이대로는 정말 곤란하다. 문제해결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한마디’가 필요한 것이다. 학문에게, 특히 철학에게 그 책임이 있다.

국가라는 지평에서, 역사라는 지평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역사상의 이런 한마디가 그 ‘이후’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 각도를 벌린 것이다. 그 ‘다른 1도’를 선택한 것이다. 현재상태의 지점 A와는 다른 지점 B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테면 “나랏말쌈이 중국에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 이런 뎐차로 새로 ... 글짜를 맹가노니 수비 니겨 날로 쓰매 편안케 하고자 할 따라미니라”고 했던 저 세종의 한마디, “잘 살아보세, ...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고 했던 저 박정희의 한마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고 했던 저 김대중의 한마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려야 한다”고 했던 저 김영삼의 한마디, 그런 것들이 ‘그 이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그 세월 뒤에서 지금의 우리는 그 ‘비포/애프터’를, 그 차이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으로서 현실로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엄청나게 다른 결과다. 이 엄청난 결과는 결국 저 한마디가 벌려놓은 즉 ‘그때 거기서 그가’ 벌려놓은 저 각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그런 ‘1도’에 대해 정확하게 겸허하게 감사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지적 노력은 결국 ‘삶의 상태’ ‘삶의 양상’ ‘삶의 질’ ‘삶의 격’ ‘삶의 수준’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정적인 조건 중의 하나로 ‘국가’라는 것이 있다. 하여 우리의 학문도, 특히 철학도 이 ‘국가’의 질과 수준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박종홍 이래 한국철학의 한 전통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나라의 질적 수준은 과연 어떠한가.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저 피히테 같은 심정으로 한국 국민에게 고해왔다. 지금 이 상태로 만족하지 말자고. 최소한 중국과 일본보다는 나은, 그리고 저 유럽과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국가를 지향하자고. 이것은 결코 황당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한 꿈이라고. 그것은 ‘질적인 고급국가’를 통해 가능해진다고. 

그것을 위한 1도의 각 벌리기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간의 시간 간격을 넘으면 그것이 현실이 되어 있는 그런 지점이 반드시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 첫걸음은 동서, 남북, 좌우, 상하 ... 갈가리 찢어진 이 분열과 대결의 봉합에서부터 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 너는 나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적 명제다.


이수정 창원대 명예교수·철학

창원대 철학과 명예교수. 일본 도쿄대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철학전문과정 문학박사. 월간 《순수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창원대 교수,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 일본 도쿄대 연구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프라이부르크대 객원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학자, 중국 베이징대・베이징사범대 외적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Vom Rätzel des Begriffs(공저), 《言語と現実》(공저), 《공자의 가치들》, 《시로 쓴 철학사》,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향기의 인연》, 《푸른 시간들》, 번역서로는 《현상학의 흐름》, 《일본근대철학사》,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와카・하이쿠・센류 그림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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