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본색’에서 국가 흥망의 열쇠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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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본색’에서 국가 흥망의 열쇠를 발견하다
  • 김덕수 서울대·역사교육과
  • 승인 2022.05.2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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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지도자 본색: 1인자의 본심을 읽어야 국가의 운명이 보인다』 (김덕수 지음, 위즈덤하우스, 272쪽, 2022. 04)

 

1.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의 정치공동체로, 즉 국가를 말한다. 인류는 크든 작든 국가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형성해 생존과 번영을 추구해왔다. 인권이 최고의 보편적 가치인 오늘날에도 실질적으로 인권을 보장받고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보호막이 필수적이다. 개인의 행불행이 많은 부분 국가공동체의 보호막 아래에서 좌우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현대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하지만 실제로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지도자(들)이기에, 어떤 지도자를 가지는지는 국민의 행불행과 직결되는 문제다. 지도자는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공권력을 활용하고 공금을 사용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공동체의 발전에 이바지한 지도자는 국민에게 존경과 명예를 얻는다.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는 대통령부터 지방자치단체장까지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러 국민의 대표를 뽑는다. 그들의 책임과 권한이 막중한 만큼, 경력과 비전을 꼼꼼히 따져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재임 중에, 또는 임기를 마치고 국민에게 외면당하거나, 심지어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되어 수치를 당하는 지도자들을 경험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공약집, 토론회, 인터뷰 속 지도자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일까? 

본서는 그 답을 ‘본색’에서 찾는다.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또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 내비치는 본색이 곧 그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보라. 비록 희극 배우 출신이지만,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그의 본색은 전사 그 자체다. 이처럼 지도자의 행보와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는 데 본색은 강력한 실마리가 된다.

하지만 어떤 인물의 본색은 보통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역사적 시각이다. 우리는 지도자 본색의 교과서로 삼을 만한 역사를 이미 알고 있다. 바로 2000여 년 전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의 역사다. 로마는 왕정, 공화정, 제정을 거치며 수많은 유형의 지도자를 경험했다. 어느 때고 핏줄보다는 능력 위주로 지도자를 선택했기에, 로마의 일인자들은 기본적으로 탁월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는 빛나는 경력이 무색하게 처참히 실패했고, 그럴 때마다 로마는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야 했다. 반대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으나, 예상 밖의 능력을 발휘해 위기를 수습한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로마 지도자들의 본색을 살펴보고 이를 우리 지도자들에게 적용해보는 시도는 의미 있다. 하여 본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약 500여 년간 로마를 이끈 지도자 9인의 생애를 추적한다. 그라쿠스 형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 로마의 안녕을 위해 출사표를 던진 인물들의 본색을 유형화해 모범, 또는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기 위해서다.

 

2.

기원전 8세기 중엽 이탈리아반도 중서부의 라티움 지방에서 건국한 로마는 기원전 6세기 말에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이후 라티움 지방에서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귀족과 평민 간의 신분 투쟁을 거치며 내부 통합을 이룬 다음, 이탈리아반도 전역으로 세력권을 확장한다. 기원전 2세기 중엽이 되면 카르타고마저 제압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로마가 겪은 위기가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로마 지도자들의 활약을 살피는 건 교훈을 얻을 기회가 된다.

우선 빈부 격차가 크게 심화했다. 거듭된 전쟁 탓에 중산층이라 할 수 있는 자영농이 몰락하고 소수의 대지주가 부를 독점했다.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고, 그렇게 인구가 감소하자 당장 신병을 모으는 데도 비상이 걸렸다. 이에 이민족을 받아들였으나, 차별로 인한 갈등만 불거졌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도층은 기득권을 챙기는 데만 열을 올렸다. 특히 귀족파와 평민파의 극한 대립으로 로마 사회는 완전히 둘로 쪼개졌고, 이는 체제 교체라는 극단적 결과로 이어졌으니, 현재 우리의 이야기라 해도 믿을 만하다. 

이러한 공화정의 위기 상황에서 평민의 보호자, 즉 호민관으로 선출된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법과 곡물법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급진적인 개혁운동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원로원 내부의 보수적인 귀족 세력과 충돌해 결국 정치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아쉬운 점은 그라쿠스 형제가 좀 더 대화와 타협에 무게를 실었더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또 점진적으로라도 그들의 개혁이 분명 실현되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상대를 찍어누른 채 개혁을 진행하려 했으니, 이런 점에서 그라쿠스 형제는 ‘나만 옳다는 고집형’이라 볼 만하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와 희생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 개혁운동은 로마 인민을 둘로 쪼개었다. 이후 100여 년간 로마는 개혁운동을 계승하려는 민중파와 원로원의 위상을 고수하려는 귀족파로 양분된 채 서로 피의 보복을 일삼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귀족파의 대부가 된 술라는 민중파 지도자 마리우스와 그 세력을 잔인하게 축출한 뒤 원로원 중심의 국가체제를 재건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체제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일종의 반동이었으니, 그의 사후 급속도로 붕괴했다. 이처럼 술라는 자기가 속한 세력의 이익과 가치만을 우선으로 치고, 상대방을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적이자 적폐로 몰았기 때문에 결국 통합에 실패했다. 이런 점에서 술라는 ‘피를 부르는 청산형’의 지도자였다.

혼란이 거듭되던 기원전 60년대 중반 동방에서 전쟁 영웅 폼페이우스가 돌아왔다. 하지만 원로원은 정당한 보상과 명예를 거부했고,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대부호 크라수스 및 떠오르는 별 카이사르와 함께 반(反)원로원 세력을 결성하니, 이를 제1차 삼두정치라 한다. 제1차 삼두정치는 꽤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전쟁에서 전사하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자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원로원 내 보수 세력들은 폼페이우스를 내세워 민중파 지도자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갈리아전쟁에서 승리하고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귀족파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종신 독재관의 자리에 오르며 대대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 정적들까지 포용하며 한때 큰 인기를 누린 카이사르였지만, 원로원의 권위와 전통을 무시한 끝에 허무하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실책은 단순히 원로원을 무시했다는 데서 더 나아가 점점 독재자가 되어 공화정의 가치 자체를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기까지 했으니, 카이사르의 본색은 ‘선을 넘는 자기 심취형’이었다.


3.

카이사르 사후 로마 정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의 무시와 조롱 속에서 굴욕을 참아가며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해 시간을 벌고 힘을 쌓았다. 방심한 탓에 안일함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본인 스스로 힘을 기르기보다는 외세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힘을 얻는 데만 공을 들였다. 결국 로마 밖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려던 그의 시도는 악티움해전에서 처절히 패배하며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로써 안토니우스는 ‘패배를 낳는 야합형’의 지도자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입상_ 바티칸 박물관, 필자 촬영

안토니우스가 몰락하자 곧 옥타비아누스가 명실상부한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선배 지도자들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정치보복이나 독재정치를 거부하고, 대신 원로원과 로마 인민을 축으로 하는 공화정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특히 원로원의 권위를 회복시켜 로마의 좋은 전통이 계승되도록 함으로써,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다. 동시에 로마 인민의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국부’로 칭송받았다. 그 결과 자연스레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평화 시대를 열며 로마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던 아우구스투스였기에, 그로써 제정이 시작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다만 카이사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로마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나아갔으므로, ‘포기를 모르는 야심형’의 지도자라 부를 만하다. 

제정이 시작되고 200여 년 정도 지나면, 로마는 황제 네르바를 시작으로 하는 5현제 시대를 맞는다. 이때 로마는 국방부터 경제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최초로 제도화된 복지를 실행하니, 네르바가 시작해 그다음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트라야누스는 유력한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로마 본토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오직 능력만으로 황제가 되었으므로,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이 정의로운 지도자를 낳는다는 좋은 예다. 실제로 트라야누스 시절 로마는 최전성기를 누렸으니, ‘태평성대를 이끈 정의형’에 어울리는 지도자였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순방하는 황제였다. 즉 본토에만 머물지 않고 로마의 광대한 속주들을 일일이 다니며 민생을 돌보았다. 또한 팽창 대신 방어에 초점을 맞추며 변방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 집중했다. 사실 이런 순행과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자도 많았다. 순행은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방어 중심의 외교 정책은 로마답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고집으로 로마는 평화를 유지했으니, ‘정도를 걷는 뚝심형’의 지도자는 당장의 인기가 아닌 오직 공익에만 봉사한다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방의 게르만족과 동방의 페르시아제국에 동시에 압박당하며 큰 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도 국경을 수호하는 장군들이 황제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장군 중 하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너무나 쉽게 다른 이들과 권력을 나누었다. 그렇게 로마는 두 명의 황제와 두 명의 부황제가 다스리는 4제 통치 시대를 맞게 되니, 이로써 국운을 연장할 수 있었다. 어쩌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함께 다스리는 협치형’의 지도자 아니었을까? 

이처럼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는 다양한 지도자의 활동 무대였다. 하여 5년마다 대통령을 선출하고, 4년마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지도자들을 선출해야 하는 우리에게 로마 지도자들의 삶은 그 자체로 역사의 거울이 된다. 실제로 그들과 바로 우리 곁의 지도자들이 자연스레 겹쳐 보일 정도다. 그라쿠스 형제처럼 선견지명이 독이 된 지도자, 카이사르처럼 한순간에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만의 정치를 펼친 지도자, 디오클레티아누스처럼 권력을 나눠 진정한 통합의 가치를 실현한 지도자를 누구나 한두 명쯤은 떠올릴 것이다.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지도자의 본색 때문이다. 그러니 로마 지도자들의 삶과 본색에서 작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지 충분히 따져보자. 그러면서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것은 버린다면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김덕수 서울대·서양고대사 전공

                                                 <사진=문화일보 사진기자 김동훈 제공>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나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로마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원대 교수,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최근 EBS의 <클래스e>에서 ‘불멸의 제국 영원한 로마’를 강의하고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해 로마사를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지도자 본색』, 『그들은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는 역사가 되었다』, 『바울, 크리스트교를 세계화하다』, 『로마와 그리스도교』 외 다수가 있으며, 공저로 『아우구스투스 연구』,  『로마제정사연구』, 번역서로는 『하이켈하임 로마사』, 그리고 공역으로  『로마문명사』, 『로마혁명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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