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가 World를 바꾼다…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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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가 World를 바꾼다…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5.01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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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시기 머시기: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 이어령 저 | 김영사 | 304쪽

 

“나, 눈먼 사람이에요.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사인보드를 들고 선 시각장애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없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사인보드를 수정해줬더니 갑자기 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너무 멋진 날이에요. 그런데 난 그걸 볼 수가 없어요.” 같은 상황을 다르게 표현하기만 해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례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기호학자, 문화기획자, 교육자, 장관으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동해온 이어령의 여정 중심에 ‘언어’가 있었다. 이해력과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단 두 마디 거시기 머시기의 마법부터 죽음을 통해 생을 말하는 모순과 역설의 미학, 소통 불가능한 세계를 지배하려는 번역의 욕망, 그리고 디지털 시대 집단 기억 장치로서 영원히 남을 책이라는 보물까지, 이 책에 실린 총 여덟 번의 강연은 일생 언어의 힘에 천착해온 이어령의 글쓰기 인생 전체를 아우른다.

언어가 병들면 세계가 병든다. 선동하는 언어에 부화뇌동할 때 나의 세계도 무너진다. 언어의 세계 속에서 창조력 상상력을 발휘할 때 나의 세계를 설계할 수 있다. 지(知)의 최전선에서 ‘디지로그’ ‘생명자본’ 등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온 이어령 80년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거시기 머시기’는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다. 저자는 막연한 언어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더듬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이 단어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간 좌익과 우익,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등 명확한 언어로써 편 가르기해 왔음을 보여주고,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가위바위보’, 새이며 쥐인 ‘역(逆)박쥐’처럼 관계와 융합에 더 골몰해야 함을 피력하는 것이다. ‘거시기 머시기’라는 단어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태까지 포용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기쁠 때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좋아 죽겠다” “죽여준다”에서처럼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극상의 긍정어인 셈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도 한국인이 잘 쓰는 관용어가 나온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따라서 「진달래꽃」은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아닌, 가장 지고한 사랑의 기쁨을 가장 슬픈 이별의 상태로 표현하는 시가 된다. 사랑을 생으로, 이별을 죽음으로 대치해보면 김소월의 시적 아이러니는 인간의 삶 전체의 공간으로 확대될 수 있다. ‘죽음’을 통해서 ‘생’을 말하는 역설의 발상이다. 한 가지 의미로만 해석하려고 할 때 시는 미학을 상실한다. 저자는 시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역시 OX로 재단할 수 없음을 말한다.

저자는 번역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귀중한 경험을 들려준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주제가 ‘벽을 넘어서’로 결정되기까지, 저자는 실로 많은 벽을 넘어야 했다. 저자는 ‘장벽’이라는 일상어에는 메타포가 없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고 보고,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이 단어를 표어로 삼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해냈다. 한국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리워딩, 즉 ‘언어 내 번역’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 ‘벽’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는 ‘언어 간 번역’과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전달하는 ‘기호 간 번역’까지, 서울올림픽 문화행사를 기획하면서 모든 종류의 번역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침묵을 최고의 번역으로 친다. 한 나라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다져진 말을 다른 나라의 말로 완벽하게 번역해낼 수 없을 때 때로는 원어 그대로 씀으로써 오히려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직접 한 말을 번역하지 않고 남겨둔 것도 번역인 셈이다. 나의 익숙한 언어가 낯선 다른 언어를 만날 때, 나의 세계는 더 넓어진다.

저자는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예견이 득세했을 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대립이 아니라 그 둘의 상호보완을 이야기했다. 종이의 기록성을 중시하는 지지자(知之者)와 종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호지자(好之者), 종이를 쓰고 버리는 낙지자(樂之者)를 소개하며, 종이와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설명한다. 종이는 지지자의 길을 걷다가, 싸는 물건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보자기처럼 포장하거나 가지고 놀 수 있는 호지자의 길로 들어서서, 이제는 기록성조차 의식하지 않는 낙지자의 길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낙지자의 종이야말로 마음대로 쓰고 지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된 종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책은 물성으로 정의되는 게 아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단 기억의 다른 이름이다. 역사는 바꿀 수 없지만 아픈 과거를 극복하는 힘,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힘이 바로 그 집단 기억에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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