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과 수성을 두루 이룬 위대한 군주,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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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과 수성을 두루 이룬 위대한 군주, 태종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5.0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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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평전 | 박현모 지음 | 흐름출판 | 368쪽

 

조선 제3대 국왕인 태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 후세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자신과 길을 달리했던 인물(정몽주, 정도전 등)들을 비롯해 자신이 보위에 오르는 데 공헌한 바가 있는 외척(민무구·민무질 등)과 공신들을 거리낌 없이 숙청했던 사실들로 인해 그는 잔인무도한 권력욕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그의 서늘한 칼날은 이복형제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피의 숙청 과정은 후일 세종이 정치적 안정 속에서 태평성대의 치세를 이어갈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여말선초, 왕조가 뒤바뀌던 혼란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권력의 화신’과 ‘수성의 군주’라는 극단의 면모를 두루 보여줬던 태종의 삶은 굉장히 드라마틱한 지점이 있다. 오늘날에도 그를 주요 인물로 삼은 드라마와 소설 등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다.

하지만 잔인무도한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정작 정치가로서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피의 숙청’을 통해서라도 왕권 강화를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려지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창업과 수성에 그 어느 국왕보다 깊이 관여했던 태종 리더십의 진면목을 조명한 이 책은 조선 건국 후 창업기를 거쳐 수성기로 진입하는 역사의 전환기에 그 중심에 있었던 태종의 언행들을 실록을 비롯해 다양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되살려내는 데 초점을 두었다. 태종은 여러 지점에서 탁월성을 보인 인물이었지만, 무엇보다 ‘위기 경영’에 매우 능했다. 특히 왕위에 오르기 전, 1388년 5월 위화도회군 때부터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까지의 12년간은 그의 정치적 생명이 백척간두에 매달린 듯 위태로운 시기였는데, 그때마다 태종은 늘 ‘선발제지(先發制之, 먼저 나서 사태를 진압한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한 문제의 싹을 제거해버리며 사태를 유리한 방향으로 반전시켰다.

“이상적인 군주란 온갖 도전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굳센 의지와 함께 일의 이치를 꿰뚫는 눈을 가진 존재다. 이 군주상에 걸맞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사람을 말할 수 있겠다. 바로 조선의 제3대 국왕인 태종 이방원이다. 500년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아낸 정치 비전과 국가 기강 정립, 그리고 무엇보다 인재 경영 측면에서 태종을 따라갈 지도자가 없다.”
_ 「여는 글」 중에서

『태종 평전』은 총 7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정치가 태종’)에서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역사를 조명한다. 위화도회군으로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부터 1400년 즉위하기까지 태종은 총 다섯 번의 위기를 맞이한다. 회군(回軍)과 건국(建國)과 즉위(卽位)라는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동안 그가 보여줬던 도전과 응전의 장면들은 이후 태종이 왕좌에서 보여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서막이다.

제2장(‘왕의 여자들과 인간 이방원’)과 제3장(‘태종 재상 3인방’ 이야기)에서는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한 명인 부인 원경왕후 민씨를 비롯해 태종 재위 시절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만들어나간 명재상 조준, 하륜, 권근 등 ‘태종의 사람들’을 다룬다. 왕권과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외척과 공신은 과감히 숙청하되, 정치적 비전이 일치하고 능력이 출중했던 이들은 품 안으로 거둬들여 끝까지 책임졌던 모습에서 ‘가(家)’보다 ‘국가(國家)’를 우선시했던 태종의 절대적 국가관과 인재 등용의 원칙을 이해할 수 있다.

제4장(‘태종의 나라, 조선’)과 제5장(‘실용 외교와 국방’)에서는 권력 쟁탈이라는 정치사 위주의 서술 속에 가려졌던 태종식 국가 경영의 실제를 국내외로 나눠 묘파한다. 태종은 온 백성이 ‘가족같이 화합하고 잘 사는 나라’, 즉 ‘소강(小康)의 나라’를 정치 비전으로 제시하고, 국가 통속력을 높이기 위한 각종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신문고 운영, 전국의 토지 전수 조사,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제에 해당하는 호패법 도입과 실행, 불교 개혁, 노비종부법 시행 등 태종 재위 시절에는 민생 안정과 국가 기강 정립을 목표로 각 분야에서 다양한 입법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사대교린의 원칙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실용 외교로 혼란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국경에서의 소요를 진압하고 국익을 지켜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독도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도발이 계속되는 요즘, 우리나라 영토 이슈와 관련해 『태종실록』에 담긴 기록들은 이들 지역을 우리 영토로 지켜내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근거로 작용한다(『태종실록』은 ‘백두산’과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이다). 태종 재위 시절 조선왕조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창고를 증설해야 할 정도로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고, 외척 세력 제거로 왕실이 안정되었으며, 명나라와 단단한 신뢰를 구축한 상황이었다. 태종의 이런 치적들은 국내외적 정치 안정이 성공적 개혁 달성의 조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태종이 일군 일련의 성과들 중 그의 일생 최대의 업적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성공적인 왕위 승계 작업이다. 만일 태종이 충녕대군을 포함해 왕자들을 보호하지 않았거나, 마지막에 과감히 세자 교체를 단행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세종 치세’는 불가능했으리라. 제6장(‘성공적인 전위, 리더십의 대단원)에서는 태종이 왕위를 승계하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서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의 화신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킨다. 그가 정치를 시작한 이래 취했던 일련의 조치들, 예컨대 정적의 척살, 내외척 제거와 같은 행동들은 많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충분하다’라면서 권좌에서 스스럼없이 물러남으로써 태종은 자신이 권력 중독자가 아님을 증명한다.

왕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추진력은 있었으나(‘강거목장’의 리더십), 국왕의 생각을 뛰어넘는 창의력 있는 인재의 출현은 일정 부분 가로막았다. 세종의 위대함은 부왕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부왕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점이다. 무엇보다 세종 재위 기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척살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이는 정치에 대한 당대 대소신료와 신민들의 신뢰를 회복시켰다.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종시대 인재들은 저마다의 능력을 자유로이 꽃피웠고 이는 태종에서 시작해 세종으로 이어지는 50여 년(1400~1450년)이 ‘한국 문명의 위대한 축(pivot)’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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