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화의 철학’으로서의 니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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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화의 철학’으로서의 니체 철학
  • 박찬일 추계예술대
  • 승인 2022.04.2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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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정당화의 철학: 니체 「비극의 탄생」』 (박찬일 지음, 푸른사상, 440쪽, 2022. 02)

 

(1) 니체 철학을 정당화의 철학으로 명명할 때, 이것은 『비극의 탄생』에서 『차라투스트라』(1882-1885)를 거쳐, 『도덕의 계보』(1887)에 도달하는 니체 철학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이 된다. 미적 가상에 의한 인생의 정당화(『비극의 탄생』), 대지의 철학으로서, 즉 초인간 사상 및 영원회귀 사상에 의한 인생의 정당화, 혹은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차라투스트라』), 선악을 넘어, 양심의 가책을 넘어, 금욕적 이상을 넘어, 즉 기독교적 요구를 넘어 인생 그 자체의 정당화(『도덕의 계보』) ─‘정당화’가 니체 철학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이 된다. 

(2) 『비극의 탄생』(1872):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정당화하는 것’에 그리스인들의 의지를 넘어 니체의 의지가 반영된 것을 강조해야 한다. 정당화는 ‘긍정’으로서, 벌써 니체 철학의 본류이다. [‘『비극의 탄생』’은 벌써 대지에 대한 전면적 긍정으로서 ‘대지 철학의 탄생’이다] 인간 삶의 정당화로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벌인 눈물겨운 투쟁을 상기하라. 그의 초인간 사상 및 영원회귀 사상은 모두 긍정의 철학이다. 『비극의 탄생』의 언어로 말하면 ‘정당화’의 철학이다. 시인(是認, Rechtfertigung)의 철학이다. 니체에 의할 때, ‘호메로스’에서 이미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으로서 삶에 대한 정당화의 철학이 탄생했다. 

(3) [중간 보유(補遺): ① 영원회귀 사상이 초인간 사상을 많이 포함한다. ‘인생이여,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게 하는 것이 영원회귀-론(論)의 핵심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 ewige Wiederkehr des gleichen’이 이루어져도 똑같이 살아주겠다, 봄-여름-가을-겨울 똑같이 살아주겠다, 생-로-병-사의 대파국의 여정을 되풀이해서 똑같이 살아주겠다, ‘용기’를 실어 이렇게 말할 때 이것은 영원회귀에 관해서이다. 

② 영원회귀의 핵심은 ‘똑같이 그대로 살아주겠다!’이므로, 사실로 말할 때 다시 살아주는 경우는 오지 않으므로, 영원회귀 사상은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그대로 살아주겠다’이므로, 영원회귀의 핵심은 ‘이’ 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속류적(俗流的)으로 말해, 한번뿐인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영원회귀의 핵심은 ‘다시 똑같이 살아주리라’(사실, ‘다시 다시 태어나더라도’는, 말이 그렇지 수사학적 위트이고 수사학적 위용이다)에 있지 않고, 지금 인생에 대한, 한번뿐인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차안(此岸)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피안(彼岸)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다. ‘거피취차 去彼取此’가 말하는 바다. ‘차안을 희생시켜 피안에 들어가는 것’를 거부한다. ─ 사실 피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진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 어조이다.

③ 주지하다시피, ‘죽음이 거기에 포함된 삶’에 대한 전면 긍정의 자세가 초인간의 자세이므로 ‘초인간’의 자세는 一平生(일평생)에 해당하는 자세일 수밖에 없으나, ‘영원회귀’는 초인간의 一平生에 해당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해서, 간단히 초인간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 같은 인생이 영원히 되풀이될 것을 전제하므로 영원회귀 사상은 영원(永遠)에 대(對)하는 자세이다; 권력의지를 기준으로 할 때, 초인간 사상보다 영원회귀 사상이 더 강력한 권력의지[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발언한다. 초인간 사상보다, ‘죽음’에 대범한 자세로서 ‘자발적 몰락 의지’가 그 표상인 초인간 사상보다, 영원회귀 사상이 더 강력한 관점주의 perspectivism를 낸다. 힘의 증대를 기준으로 할 때, 초인간 사상보다 영원회귀 사상이 더 강력한 ‘힘의 증대’를 발언한다. 초인간 사상의 적분이 영원회귀 사상이다. 영원회귀 사상의 미분이 초인간 사상이다. 

④ 초인간 사상이 ‘일평생(一平生)’의 자세로서 유한한 자세를 말할 때, 영원회귀 사상은 ‘무한한 것에 대한 자세’를 말한다. 인생을 무한히 정당화시킬 때 이것이 영원회귀 사상에 관해서이다. 구제형이상학을 기준으로 할 때, 같은 정당화의 철학으로서, 초인간 사상에 대한 영원회귀 사상의 질적 우위를 말할 수 있다. 영원회귀 사상과 초인간 사상은 둘 다 용기의 형이상학이다. 같은 용기의 형이상학이나 용기의 양을 놓고 볼 때 영원회귀 사상이 앞에 가고 초인간 사상이 그 뒤를 따라간다] 

 

(4) 올림포스산과 올림포스산(山)의 반영인 호메로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인간 삶에 대한 의지, 곧 그리스적 의지의 첨예한 반영이다. (자연의) 잔혹성에 직면해, 자연의 잔혹성을 넘어서려는(정당화를 통해 넘어서려는) 그리스 의지의 반영이다. 그리스인의 명랑성과 소박성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니체는 고대 세계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말한다. 여기에 큰 몫을 한 것이 “그리스 하모니—그리스 미—그리스 명랑성”을 얘기한 괴테, 실러, 빙켈만의 이른바 “교양 투쟁 Bildungskampfe”(『비극의 탄생』, Ⅲ-1, 20장, 125-126)이다.

‘이후의 그리스 고대 수용사’를 모두 포괄해서 말하면, 루소와 헤겔에서 우선적 책(責)을 말할 수 있고(이들에게 그리스 고대는 잔혹성의 표상이 아닌, 목가적 낙원이었다), 그 뒤로 마르크스-프로이트-루카치-하이데거 등에서 責을 말할 수 있다. 니체가 고대 “그리스 본질의 핵심”(125)에 대(對)해, 즉 낙원(예술)에 대해 다른 인식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니체는 괴테-실러-빙켈만들이, 그리고 루소-헤겔들이 “(그리스) 원초적 인간을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예술적 인간으로서 파악한 것”(19.장, 118)을 뒤집는 시도를 한다. 여기가 『비극의 탄생』의 가장 의미 있는 부분 중 하나이다. 빙켈만은 「라오콘」 상에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말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을 말하지 못 했다. 우연이 아닌 ‘필연’을 말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는, 니체에 의할 때, ‘영원한 상실의 비가적 고통’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여기서 ‘비가적’이라는 말이 목가적이라는 말의 상대어가 아니라, 혹은 흔히 말하는 ‘목가(牧歌) 이후의 비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영원한 비가로서 비극적 세계 인식’을 말한다. 니체에게 고대 그리스인들의 “멋진 소박성”은 “암울한 심연에서 성장한 아폴론적 문화의 봉오리”(17.장, 111)이었다. ‘멋진 소박성(素朴性’)은 ‘조건’이 아니라, 결과였다. 

호메로스는 ‘암울한 심연’에 “아폴론적 문화의 최고의 작용”이 거두어 올린 승전가였다. 실러가 생각하는, “인간과 자연의 통일”이 반영된 호메로스의 素朴성-素朴문학은, 그리고 그 “예술어 나이브 naiv”는, “모든 문화의 입구에서, 인류의 낙원에서, 마주쳐야만 하는 몹시 단순하고, 자생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3.장, 33); 호메로스 예술가의 서사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전성기의 아티카 비극 역시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민족이 그렇게 아름답게 될 수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통을 겪어야만 했겠는가!”(Ⅲ-1, 25.장, 152) ─ 『비극의 탄생』의 또 하나의 주제문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호메로스 이전의, “인류 초기의, 원초적 근원 풍경”(121)은 ‘암울한 심연’이고, ‘영원한 고통’이고, “진짜 자연의 무서운 진지함”(121)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고대는 ‘인류가 낙원에 살던 시절’이 아니었다[‘원시공산사회는 낙원이 아니었다’]. 요컨대 그리스 고대는 “인간의 태고 시대”, “원초적 인간”(19.장, 120)이 곧잘 상징하는 유토피아 시대가 아니었다.

루소의 자연적 인간으로 표상되는 ‘원초적 인간’은 니체에 의할 때 망상이었다. [니체는 루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연 상태’가 함의하는 ‘진지한 형이상학’에 대해 무지했던 루소, 평민에게 지배권을 넘겨준 민주주의자 루소, 인간 천성을 무시한 ‘사회주의운동’의 원조 루소. 니체에게 요컨대 루소는 “이상주의자와 천민 Canaille을 한 몸에 지닌, 전형적 ‘근대 인간’”(『유고 단편들. 1887년 가을─1888년 3월』, Ⅷ-2, 66)이었다] 古代 (또한) 끔찍한 자연 상태─ ‘생로병사의 잔인함’을 ‘날 것’으로 보여주던 시대였다. 실러가 생각하던 것처럼 인간이 곧 ‘자연=인간’인 곳이 아니고, 오페라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가가 울려 퍼지는 곳이 아니었다. 

요컨대 고대 그리스는 ─ 생로병사의 잔인성에 대한 대응으로서, 비극적 세계 인식의 대응으로서, ‘디오니소스 제례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디오니소스 제례의 ‘합창-댄스-악기’에 의한 “‘음악적 불협화음’”(24.장, 148)이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불협화음 Dissonanz”(24.장-25장, 148-151 참조)이 ‘끔찍한 자연 상태의 불협화음’에 對한 대응이었다. 디오니소스 제례가 ‘끔찍한’ 자연 상태를 견딜만한 것으로 해주었다면, 디오니소스 제례가 벌써 형이상학이다. [인류는 형이상학적 동물이다] 

비극적 세계 인식이 인류예술의 근원이라는 것, 형이상학이 인류예술의 근원이라는 것. 목가를 예술의 근원으로 볼 수 없다는 것. 잃어버릴 자연이 아예 없고, 도달하지 못할 이상이 아예 없던 곳, 목가와 비가의 경계가 없던 곳, 오로지 생로병사의 잔혹성이 있던 곳, 그곳이 ‘인류예술’의 발원지라는 것. 니체는 素朴사회에 제동을 걸고(고대는 ‘소박예술’을 요청하고, 현대는 ‘성찰예술’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시공산사회에 제동을 건다.’ 

(5) 니체 철학은 주지하다시피 긍정의 철학이다. 긍정의 다른 말이 정당화이다. 니체가 ‘모든 것은 부당하고, 모든 것은 정당하다’(“현존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며, 그리고 부당하다.” 9장)고 했을 때 이것이 필자의 가슴을 뛰게 했다. 고통이 모든 것으로서 부당하다. 그리고 고통[생로병사-희로애락]이 모든 것으로서 정당하다. 고통은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와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가 반영된 그리스비극에 의하면 정당하다.

아가멤논에 의한 (딸) 이피게네이아의 ‘공양’이 인간이 인간을 ‘희생양 시키는 것’을 정당화한다. 아가멤논의 처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에 대한 복수로서, 그를 처단한 것이 인간의 복수를 정당화하고, 아들 오레스테스가 누이 엘렉트라와 합심하여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에 분노, 그녀를 처단한 것이 인간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대를 이은 저주를 정당화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약탈이 인간의 약탈을 정당화시키고, 프로메테우스의 (코카서스 산에서의 독수리에 의한) 영원한 형벌이 인간의 형벌[고통]을 정당화 시킨다; 오이디푸스의 ‘신비스러운 삼위일체’(니체), 즉 신성모독[스핑크스 수수께끼 해독], 아비 라이오스왕 살해, 어미 이오카스테와의 결혼 등 천인공노할 범행(혹은 악무한의 범행)과 그것이 유발시킨 고통이 인간의 악무한의 범행과 인간의 고통을 정당화시킨다. 

 

라파엘의 '그리스도의 변용'

(6) [“그리스 ‘의지’ hellenische ‘Wille’에 의한 것으로 […] 신들은 인간의 삶을 스스로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당화 한다 […] 신들의 밝은 햇볕 속에서 인생을 그 자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낀다. 그리고 호메로스적 인간의 본래적 ‘고통’은 인생으로부터 헤어짐, 무엇보다도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과 관계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실레노스 지혜를 뒤집어서 그리스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나쁜 일은 곧[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며, 그다음 나쁜 일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탄이 일단 울리게 되면 그것은 단명한 아킬레우스에 대해서도, 나뭇잎과 같은 인간 종족의 무상함에 대해서도, 영웅시대의 몰락에 대해서도, 다시 울리게 된다. 비록 날품팔이로서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것은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조차도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적) ‘의지’는 아폴론적 단계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삶을 갈망하며, 호메로스적 인간은 삶과 자신이 일체라고 느끼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비탄마저도 삶에 대한 찬가가 된다.”(『비극의 탄생』, Ⅲ-1, 3.장, 32-34)] 

신들이 정당화하는 것은 인생, 인간의 삶이다. 생로병사-희로애락의 삶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사실대로 말하면, 그리스 의지에 의한 것으로서, 신들이 인간의 삶을 살게 함으로써 신들이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게 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인생을 ‘그 자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das an sich Erstrebenswerthe’으로 말하게 해야 한다. 구원의 주체는 신(神)이 아니라, 그리스 의지이다. 구원의 주체도 그리스인이고, 구원의 객체도 그리스인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인간이 주체인 전성기 호메로스 시대, 전성기 그리스비극 시대에 관해서이다. 

“숲의 신의 (전체) 철학 (ganze) Philosophie des Waldgottes”(3.장, 32)에 ― 실레노스는 디오니소스의 시종장이며, 또한 숲의 신이다 ― 니체 철학이 더해졌다. 니체에 의한 ‘실레노스 지혜’의 패러디가 말하는 것이 많다. [실레노스 지혜는 니체 철학과 배리 관계이다] 실레노스 지혜를 요약하면 ‘가장 나쁜 것은 태어난 것이며, 이것은 어쩔 수 없고, 차선책이 있으니 바로 죽는 것이다. 바로 죽어라!’이다.(『비극의 탄생』 3.장 31 참조); 이것을 뒤집은 그리스인들의 새로운 버전을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나쁜 것은 ‘곧[반드시] 죽는 것’이며, 그다음 나쁜 것은 ‘언젠가 죽는 것’이다. 가장 나쁜 것이 태어난 것이 아닌, ‘곧[반드시] 죽는 것’이 되었고, 차선책 ‘바로 죽어라!’가, 두 번째 나쁜 것으로서 ‘언젠가 죽는 것’이 되었다. 차선책 ‘ 바로 죽어라!’는 ‘(계속) 살지 말라!’는 것이다. 즉 실레노스 지혜의 두 번째 나쁜 것이 ‘계속 사는 것’이었다. 실레노스 지혜의 패러디로 두 번째 나쁜 것이 ‘언젠가 죽는 것’일 때 이 또한 첫 번째 나쁜 것과 마찬가지로 실레노스 지혜의 뒤집기이다. 두 번째 나쁜 것인 ‘계속 사는 것’이 ― 그리스인 의지에 의해 ― (두 번째 나쁜 것으로서) ‘언젠가 죽는 것’으로 뒤집어졌다. 

‘실레노스의 지혜’가 기본적으로 자연의 잔혹성에 관해서이다. 회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잔혹성에 관해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레노스 지혜는 그리스인 지혜로서 자연의 잔혹성에 대한 통찰에 의한 것이다. 통찰이 있고, 통찰의 결과가 그 뒤를 따른다고 할 때 이것은 분명 자연의 잔혹성에 대한 역전 드라마일 것이다. 실레노스에 의한 통찰의 결과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었고, ‘바로 죽는 것이 두 번째 좋은 것’이었다. 실레노스 지혜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실존의 잔혹성에 대한 명료한 처방이기도 하다. 존재론의 첫 번째 페이지에 오를 만하다. 물론 여기에서 인생을 살만하고 견딜만하게 하는 구원의 형이상학을 말할 수 없다. 

‘실레노스’ 대신 그리스인의 지혜─그리스 의지가 구원의 형이상학을 말한다. 첫 번째 역전 드라마가 주지하다시피 ‘신들이 인간의 삶을 살면서 인간의 삶을 정당화 시킨다’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말하는 바이다. 첫 번째 역전 드라마에 뒤따르는 두 번째 역전 드라마가 실레노스 지혜의 패러디이다. ‘곧[반드시] 죽는 것’을 가장 나쁜 것으로, ‘언젠가 죽는 것’을 두 번째 나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또한 그리스 의지에 의한 것이고, 확실하게 말하면, 그리스 의지를 ‘발견’한 니체의 통찰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 의지가 삶에의 의지에 관해서이다. ‘삶에 대한 찬가’에 관해서이다. 피안을 부정하고, 차안을 무한히 긍정하는 점에서 벌써 니체 철학의 본류이다. 피안을 위하여 차안을 희생하지 않는 것이, 피안을 위해 차안을 볼모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할 때, 니체 철학의 본류에 관해서이다. 

그리스인들이 만든 신은 그들 그리스인들에게 명령하는 신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이 만든 신은 (기독교의 유일신과 달리) 그들 그리스인들에게 명령하는 신이 아니다. 신들의 명령 Imperativ을 받기 위해, 신들의 꾸짖음 Vorwurf을 받으려고 그들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들을 통해 그리스인들 자신을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verherrlichenswerth’ 것으로 느끼기 위해 그들[신들을]을 만든 것이다; 인생을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게 한 것이 저 장려한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 호메로스 신들의 세계이다. 물론 신들이 인간의 삶을 살면서 인간의 삶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인생은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니체 철학의 본류로서 인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역시 내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생은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그 이상을 지시한다. 예술-형이상학의 탄생이다. 그리스인들의 예술 형이상학의 탄생이고, 니체의 예술 형이상학의 탄생이다. ‘찬양할 가치가 있는 인생’은 예술에 의한 것으로서, (역시 예술에 의한 것인) ‘견딜만하고 살만한 인생’의 다른 버전이다. ‘예술에 의한 긍정’의 철학이라는 점에서 같다.

니체의 예술 형이상학에는 아폴론적 단계가 포함되고, 디오니소스적 단계가 포함된다. 니체가 ‘아폴론적 단계 appolinische Stufe’를 굳이 말하는 것은 디오니소스 단계를 의식한 때문이다. ‘인생은 오로지 미적 현상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는 니체 고유의 예술 형이상학의 격률에서 ‘미적 현상’에 아폴론적 미적 현상이 포함되고, 디오니소스적 미적 현상이 포함된다. 니체의 예술 형이상학은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전개된 아폴론적 꿈 예술에 관해서이고, 무엇보다 전성기 그리스비극에서 전개된 디오니소스적 도취 예술과 아폴론적 꿈 예술에 관해서이다. 전성기 그리스비극에서 압도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 도취 예술이었다.

(7) ‘디오니소스’는[디오니소스 합창단 예술은] 대지의 예술이고, 삶의 예술이고, 대지에 대한 전면적 긍정의 예술이고, 그 반영의 예술이라는 점이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디오니소스 예술의 키워드는 불협화음[파멸]이고, 불협화음[파멸]의 정당화이다. 예술 신에 의해 보증된 파멸은 (여기에는 아폴론적 무대 주인공의 파멸이 포함된다) 진리의 위상을 갖는다. 神은 ‘믿을 만한 신’으로서 반박 불가능성이 특징이다. 진리는 반박 불가능성이 특징이다. 디오니소스적 불협화음이 표상하는 파멸은 반박 불가능으로 정당하다. 긍정의 대상이다. ‘아폴론 무대’에서 펼쳐지는 파멸의 파노라마 또한 정당화의 대상이다. 신, 혹은 신적 영웅의 파멸이 인간(혹은 미학적 청중)의 파멸을 정당화한다. 프로메테우스의 고난이, 오이디푸스의 고통이, 오레스테스 가문의 저주가, 진리로서 파멸을 정당화한다.

니체에 의한 것으로서 차라투스트라 철학의 분명한 ‘선취’를 강조해야 한다. [그리스 의지가 올림포스 신들을 만들고, 올림포스 신들로 하여금 인간의 삶을 살게 했다. 신들의 삶이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게 했다. 나아가 ‘삶을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끼게 했다. ‘삶을 강력하게 갈망하게 했다.’; ‘인생을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끼게 했다. ‘삶에 대한 찬가’를 부르게 했다. 요컨대 삶을 살만하고 견딜만한 것으로 긍정하게 했다. ─ ‘긍정의 철학’[정당화의 철학]이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니체의 호메로스 해석에서, 특히 그리스비극 해석에서, 즉 아폴론적 무대 비극 해석에서, 디오니소스적 합창단 오케스트라 비극 해석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본다. 차라투스트라 철학의 선취를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대지 철학으로서, 대지에 대한 전면적 긍정의 철학으로서 정당화 철학의 절정이다.

『정당화의 철학』을 위해 『비극의 탄생』 3.장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 ① ‘올림포스 세계’의 탄생이다(“살아낼 수 있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신들을, 깊숙한 내적 필요에 의해 창조해낼 수밖에 없었다.”, 32) ② ‘신들이 인간의 삶을 살면서 인간의 삶을 정당화한다.’ 생로병사-희로애락을 정당화한다. ③ 인생은 살만하다. 삶은 ‘그 자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었다. ④ 니체 철학의 선취이다. 죽음에 대한 욕구가 아닌, 삶에 대한 욕구가 분명히 전경화(前景化)되었다.

 

뒤러의 동판화 작품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1513·왼쪽)와 니체. 니체는 자신의 첫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이 작품 속 기사에 대해 “희망이 없다.그러나 그는 진리를 원한다.그와 필적할 사람은 없다”고 했다.<br>
뒤러의 동판화 작품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1513·왼쪽)와 니체. 니체는 자신의 첫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이 작품 속 기사에 대해 “희망이 없다.그러나 그는 진리를 원한다.그와 필적할 사람은 없다”고 했다.

(8) 『비극의 탄생』에서 호메로스는 마치 차라투스트라의 전생(前生)인 것 같다. 물론 단서를 붙여야 한다. ‘좁은 의미의 차라투스트라’이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말할 때,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많이 분유(分有)된 것은 ‘디오니소스’이다. 호메로스에서 삶[대지]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 차라투스트라를 떠올리게 하지만, 디오니소스에서는 ‘인간의 영원한 죽음’이 포함된 대지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 차라투스트라를 떠올리게 한다. 디오니소스가 ‘근원적 일자’로서 ‘근원적 일자의 통찰’에 의해 ‘근원적 고통’과 ‘근원적 모순’과의 합일을 부추길 때 분명 이것은 ‘자발적 몰락에의 의지 freiwilliger Wille zum Tode’가 그 표상인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이다. 디오니소스적 미적 가상에 의한 ‘세계의 정당화’에 자발적 몰락에의 의지가 포함된다. 삶과 죽음(혹은 꿈과 생시)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곳에서 자발적 몰락 의지가 빛을 발한다. ‘아킬레우스’의 경우에서 보듯 영원한 죽음이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강화한다. 삶에 대한 욕망을 강화한다. 『비극의 탄생』은 벌써 니체 철학의 본류이다.

(9) 절대적 니힐리즘─절대적 무(無), 즉 ‘발판이 無’인 상황은 그리스시대의 그리스인에게도 통찰되었고, 19세기 후반 니체에게도 깊이 통찰되었다. 자연의 무관심에 의한 것으로써(‘자연은 인생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없다’) ‘실존의 잔혹성’을 간파한 ― 물론 니체에 통찰에 의한 것으로서 ― 그리스의 천재적 ‘고뇌의 재능’(‘예술과 상관관계에 있는 고뇌에의 재능’)이 있었고, 19세기 후반, 신의 사망에 의한 것으로서, 인간의 영원한 죽음에 의한 것으로서, 마찬가지로 실존의 잔혹성을 간파한, 역시 니체에 의한 것으로서, ‘차라투스트라’의 ‘천재적’ 고통의 재능이 있었다. 

그리스인은 절대적 니힐리즘, 절대적 무의 상황을 ‘비자연적 방법’인 예술의 형이상학, 예술가-형이상학에 의해 해소하려고 했고, ‘차라투스트라’는 절대적 니힐리즘, 절대적 무의 상황을 (‘존재-신-론 Onto-Theo-Logie’이 아닌) 진정한 존재론의 개시(인 것으)로서, 초인간 사상 및 영원회귀 사상 등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진정한 존재론’은 존재-인간-론 Onto-Anthropo-Logie이다.

문제는 예술가-형이상학에 의한 해소이고, 초인간 사상 및 영원회귀 사상에 의한 돌파이다. 더 큰 문제는 니체가 1872년 그리스인에 의한, 그리스의 예술 형이상학에 의한 ‘삶의 부조리’의 돌파를 말할 때 ― 그리스인의 인생의 잔혹성에 대한 비극적 통찰을 말할 때 ― 니체에 머리에 神 형이상학에 의한 인생의 돌파, 기독교 형이상학에 의한 인생의 돌파가 아예 싹으로라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872년 이미 니체는 무신론적 상황에 있었다. [1872년 니체에게 ‘이미’ 기독교 신은 부정되었다. 『비극의 탄생』은 내용이 그리스비극 형이상학이지만, 그리스비극 ‘형이상학의 탄생’이지만, 이와 무관하게 기독교 신에 부정을 『비극의 탄생』 곳곳에서 노출시켰다] 삶의 잔혹성에 대한 (그리스) 올림포스 神들에 의한 돌파는 다신교에 의한 돌파로서, 기독교 유일신에 의한 돌파와 전혀 다르다. 더구나 올림포스 신들은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잔혹한 ‘처지(處地)’의 돌파를 위해 그들이 건설한 올림포스의 신들이다. 기독교 유일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든 ‘만들어진 신’─‘건설된 에덴동산’을 말할 수 없다. [올림포스산과 에덴동산은 비동질적 유비이다. 만든 신과 주어진 신의 차이이다. 인간이 만든 산과 신이 만든 산의 차이이다]  

니체가 1872년 『비극의 탄생』에서, 인생의 잔혹성-잔인성-난폭성에 대(對)해 부조리라는 ‘난경’을 갖다 붙이면서, 그 돌파 방법으로서 예술의 형이상학을 말한 것이 주목되고, 이보다 ‘더한 것’으로 기독교 유일신을 상기하는 듯한, 사실대로 말하면 무신론적 상황을 여러 곳에서 얘기한 점이 주목되었다. 이를테면 햄릿을 예로 들어 “동경은 세계를 넘어, 신들 자체까지도 넘어서, 죽음 쪽을 향해 간다”라고 했을 때 ‘죽음’은 물론 ‘순교자적’ 죽음이 아니라, 자발적 죽음에 관해서이다. “현존[Dasein, 삶]은 그것을 눈부시게 되비치는 신들과 함께, 불멸의 피안과 함께 부정된다.”(Ⅲ-1, 52-53 참조); 신들이라고 했지만, ‘불멸의 피안’을 부정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에서의 신들은 니체 당시의 ― 그리스 당시가 아닌 것으로서 ― 기독교 유일신을 지칭한다. [그리스인의 고통이 ‘햄릿’의 고통을 넘어, 니체 당대의 고통까지 이른 것을 말해야 한다. 특히 햄릿의 고통이 고통의 일반성, 고통의 보편성을 발언한다] 불멸의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불멸의 피안의 부정이므로 이미 기독교의 부정이고, 기독교 유일신의 부정이고, 기독교의 ‘약의 니힐리즘’의 부정이다. ‘불멸의 피안’의 부정은 (햄릿의,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적 초인간’의) 자발적 몰락 의지와 함께 벌써 강(强)의 니힐리즘이다. 『비극의 탄생』은 기독교 신의 부정으로서, 불멸의 피안의 부정으로서, 벌써 니체 철학의 본류이다. 이외 원한감정Ressentiment 및 권력의지, 영원회귀 사상의 선취로서, ‘니체 철학’의 본류인 것(혹은 니체 철학에 합류한 것) 또한 강조해야 한다. (이 부분은 지면 한계 상 생략한다) 

강조하자. 열쇠어가 디오니소스이고, 아폴론이고, 정당화이고, 무엇보다 ‘고통의 정당화’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어 하나만을 꼽으라면 그것은 ‘고통’이다. 고통이 발원지로서, 디오니소스이고 아폴론이다, 그리스비극이다. 이후 ‘차라투스트라’의 초인간 사상과 영원회귀 사상도 ‘고통’에서 발원한 것으로서 이 또한 고통의 정당화에 관해서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생-로-병-사를, 똑같은 순서로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주리라 ─‘영원히 반복해서 (기꺼이) 몰락해주리라. 인생의 정당화로서 정당화의 철학이 아닐 리 없다.


박찬일 추계예술대·독문학

연세대학교 독문학과 및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일 카셀대학에서 수학(박사후과정).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시창작 교수 역임. 박인환문학상, 유심작품상, 이상시문학상 등 수상. 주요 논문으로 「유물론적 변증철학─‘플라톤’에 대한 가정적 접근」, 「하이데거-마법사에 대한 소문─소문대로 말하는 몇 개의 에끄리뛰르」, 「17세기 바로크 비애극과 20세기 ‘역사적 표현주의’ ─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 「‘자발적 몰락 의지’: 초인간 및 권력의지들 ─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A」, 「‘진정한’ 존재론의 개시로서 니체 철학 ─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B」, 「초인간 사상을 넘어 영원회귀 사상으로」, 「예술의 종말?」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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