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1000년, 최초의 세계화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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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000년, 최초의 세계화가 시작되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4.23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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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년: 세계가 처음 연결되었을 때 | 한센 지음 | 이순호 옮김 | 민음사 | 488쪽

 

이 책은 세계화란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 기원을 추적한다. 또한 오늘날의 세계가 1000년의 세계로부터 탄생했다는 대담하고 획기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우리는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돌고 아메리카로 향한 15세기 후반에 비로소 세계가 연결되었다고 믿는다. 또한 세계화를 20세기에 시작된 현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저자 발레리 한센(예일 대학 교수)은 요나라와 송나라가 맺은 전연의 맹, 카라한 왕조의 호탄 정복, 바이킹의 아메리카 상륙 등 같은 시기에 일어났지만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에서 공통된 흐름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팽창의 배후에는 기원후 1000년 무렵에 일어난 최초의 세계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여 주는 1000년 무렵의 삶은 21세기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오늘날 종교 신자의 92퍼센트는 1000년 무렵에 확립된 4대 종교(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불교) 중 한 가지를 믿는다. 세계화가 기술의 확산, 전통의 상실을 불러왔다는 점도 같다. 카이로와 콘스탄티노플, 광저우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최초의 반(反)세계화 폭동을 일으켜 외국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1000년의 세계화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저자는 생소한 환경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다짜고짜 현지인을 살해한 바이킹보다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참을성 있게 우호 관계를 쌓은 사람들이 미지의 먼 땅에서도 성공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소함에 개방적인 사람들이 새것이라면 무조건 손사래를 친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어 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1000년 무렵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바이킹은 어떻게 500년이나 앞서 신대륙에 도착했을까?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 정교회…… 러시아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거란 황제가 아프가니스탄의 술탄에게 선물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마야 신전의 벽화에 묘사된 금발 포로들은 누구일까? 말리의 만사 무사를 세계 최고의 부자로 만든 비밀은?

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들이 이 책에서는 연결된다. 1000년의 세계화는 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들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했다. 오늘날의 세계화가 그런 것처럼.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과 포인트를 몇 가지 짚자면 다음과 같다.

- 1000년 전에 결정된 신장 위구르와 러시아의 운명
10세기에 이르러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부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카라한 왕조도 그중 하나였다. 개종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종교적 열정이 넘쳤던 카라한 왕조는 1006년에 오랜 경쟁자였던 동쪽의 불교 왕국 호탄을 정복했다. 이 사건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이 이슬람화하는 출발점이었다.

같은 시기에 동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루스인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1세는 전통 신앙을 대신할 적절한 종교를 찾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네 가지 종교가 후보군에 올랐다. 유대교, 이슬람,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정교회를 선택했다. 동시대인들에게 이 선택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루스인들의 개종은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오늘날 유럽이 정교회 영역과 가톨릭 영역으로 나뉜 일은 그 결과 중 하나다.

- 발트해의 호박이 요나라 공주의 무덤에서 나오다
1005년, 요나라와 송나라의 협상단이 중국 황허강(황하) 유역의 도시 전연에서 만났다. 전연 부근까지 진출한 요나라 대군이 바로 남쪽에 있는 송의 수도 카이펑(개봉)을 위협하는 상황에서였다. 협상 결과,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요나라에 보내는 조건으로 평화를 얻었다.

요나라 황제의 손녀였던 진국공주가 1018년에 사망했을 때, 온갖 화려한 물건이 공주와 함께 묻혔다. 유리 용기와 황동 그릇은 시리아와 이집트, 이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수정으로 만든 소품은 수마트라와 인도에서 온 것들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호박(琥珀)으로 만든 장식품들이었다. 재료인 호박 원석이 ‘슬라브인의 바다’, 즉 발트해에서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국공주의 묘에서 나온 부장품은 전연의 맹 이후에 요나라가 누린 번영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1000년의 세계가 얼마나 세계화되어 있었는지도 보여 준다. 북유럽의 발트해와 중국 북쪽의 요나라 궁정 사이의 거리는 무려 6500킬로미터가 넘었다. 호박 유통로는 1000년의 세계에서 가장 긴 육로 중 하나였다.

-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하다
바이킹(노르드인)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와 달리 항구적인 영향을 남기지 못했기에 해프닝으로 취급되곤 한다. 정말 우발적이고 의미 없는 사건이었을까?

1000년 무렵에 노르드인들은 ‘빈란드’를 총 세 차례 탐험했다. 그들의 뛰어난 항해술 앞에서 대서양은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위협은 현지인들에게서 왔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활과 화살뿐 아니라 투석기까지 동원해 노르드인들을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에 못 이긴 노르드인들은 정착지를 버리고 철수해야만 했다.

약 500년 후의 콜럼버스는 성공했는데, 노르드인들은 어째서 실패했을까? 그들은 북해와 지중해를 누비며 연안을 약탈하던 사람들의 후예였다. 그러나 현지인들도 노르드인들 못지않게 강하고 사나웠다. 노르드인들에게는 철제 무기가 있었지만, 현지인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술의 차이가 거의 없는 엇비슷한 상황이라면 세계화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우리는 1000년의 유산 속에서 살고 있다. 1000년 무렵, 두려움 없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 탐험과 교역에 나섰던 이들을 통해 마침내 위대한 문명들이 연결되었다. 그렇게 발견되고 개척된 새로운 통로들은 세계 각지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상인과 순례자들은 인도양을 건너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인도, 중국을 오가는 항해를 하고 있었다.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이 시작되려면 수백 년이 남아 있었지만, 노예들은 이미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아프리카에서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 카이로로 행진하고 있었다. 예수 탄생 이후 첫 번째 밀레니엄이 끝나 가던 무렵에 세계화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이 책은 최초의 세계화가 촉발한 갈등과 협력을 교차해 보여 준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화는 승자와 패자를 함께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뀐 1000년에도 그 점은 다르지 않았고, 그 영향은 지금도 감지되고 있다. 1000년이 남긴 장기적 유산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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