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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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나온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4.23 1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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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만든 음악가들 | 로르 도트리슈 지음 | 이세진 옮김 | 프란츠 | 296쪽

 

이 책은 프랑스의 유력 방송사 ‘유럽1’의 문학·과학 담당 기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던 로르 도트리슈가 역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었던 작곡가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아낸 책으로 태양왕 루이 14세부터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역사가 되어야 했던 작곡가들의 삶을 대담하고도 생생히 구현해낸다.

방앗간 집 아들에서 루이 14세의 어용 작곡가가 된 륄리, 루터의 신봉자 바흐, 보나파르트에게 매혹되었다가 후회로 악보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던 베토벤, 평생 스탈린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동그랗고 근심 어린 얼굴의 쇼스타코비치……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열세 명의 천재 작곡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과 음악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서만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혹은 한 시대의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아도르노의 말을 빌려 “모든 음악은, 가장 개인적인 음악조차도,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집단적 내용을 지닌다”고 말한다. 음악은 사회와 역사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개인으로부터 태동하여 창작이라는 신비로운 과정을 거쳐 우리의 귀에 도달한다.

저자는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작곡가를 둘러싼 세계와 음악사적 전통, 그리고 작곡가 내면의 욕망과 불가사의한 재능을 한꺼번에 마주하는 총체적인 경험임을 드러낸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되살려낸 열세 명의 작곡가와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이 만든 작품이 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로운 현상을, 더불어 예술의 당위성에 대한 깊은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책에 담긴 기나긴 음악사의 여정은 야망으로 가득 찬 열네 살의 이탈리아 소년 장바티스트 륄리로부터 시작된다. 춤과 음악에 재능이 있었고,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었던 한 소년이 30여 년간 왕의 치세를 ‘볼거리’로 구현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과정을 그려 보이던 작가는 독일로 그 무대를 옮겨 “신의 말씀은 글이 아닌 소리로 옮겨진다”라는 루터의 철학을 평생 따랐던 바흐에게로, 이어 종교적 관용과 사랑을 좇아 프리메이슨 입단식을 치르는 모차르트에게로 종행무진 이동한다. 그 여정에서는 왕권이나 신의 권능, 혹은 종교적 환희를 칭송하는 음악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작곡가들의 사적인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곳에는 말년에 이르러 추문에 시달리다 권력에서 밀려난 궁정 악장이, 달빛 아래서 악보를 베껴 쓰는 고요한 뒷모습이, 비싼 마차를 샀다가 곧바로 후회하고 돈을 빌리러 다니는 병든 천재가 있다. 이들의 성공과 후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걸작들과 음악사적 쾌거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와 권력에 이용당하는 음악가에서부터 스스로 시대정신의 상징을 자처한 작곡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을 소개하는 한편, 작가의 시선은 사회사적 의미를 뛰어넘는 창조와 예술의 영역으로 향한다. 음악학을 전공한 로르 도트리슈는 자신의 음악적 지식을 십분 발휘해 작곡가들의 다양한 음악적 시도들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음악사적 계보와 세계사가 나란히 놓이는 모습을 통해 독자는 폭넓은 독서를 경험하며, 전 시대를 아울러 모든 작곡가들의 열망이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계속 음악을 만들기를, 자신의 음악이 언제까지나 음악당에 울려 퍼지기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어떤 작곡가들에게 음악이란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 위한 수단이었다. 누군가에겐 권력에 저항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생존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음악이란 무엇일까? 책의 가장 마지막에 놓인 이름을 통해 어렴풋이 그 답을 유추해볼 수 있다.

9·11 테러가 일어나고 4개월이 지났을 무렵, 미국의 미니멀리즘 작곡가 존 애덤스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으로부터 추모 작품을 의뢰받는다. 오랜 시간 시대의 장면을 음악으로 구현해온 이 작곡가는 고민에 빠진다. 그가 범접하기에 너무나 가깝고,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새삼스러운 질문으로 돌아간다. ‘추모를 위한 작품은 어떻게 쓰는 걸까?’

그의 말대로 음악은 결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비극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순 없다. 그러나 작가의 첨언처럼, 음악은 그 너머의 무언가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팬데믹과 전쟁으로 또다시 역사의 비극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것인지 모른다.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작곡하며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처럼.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나 보라, 인류는 합심하고 연대할 수 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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