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곧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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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곧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4.1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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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 김헌 지음 | 을유문화사 | 560쪽

 

이 책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인 김헌의 성찰로 재탄생한 신과 영웅의 세계를 담고 있다. 천지 창조가 시작되는 카오스부터 올륌푸스의 여러 신과 반신반인의 영웅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신화 전체를 개괄한다. 특히 기존에 출간된 그리스·로마 신화와 관련한 저서들 중에서 상당수가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 번역된 책을 참고하여 쓰인 데 반해 이 책은 고전학자가 희랍어와 라틴어 원전을 직접 해석하고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집필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아울러 이 책은 기존 도서와 달리 신화와 관련된 고대 문헌이나 고전 비극 장면을 직접 원문과 함께 소개해 좀 더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제우스가 에우로페에게 접근하기 위해 황소로 변신하는 일화는 단순히 설명적인 해석만으로는 그 순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달되기 어렵다. 하지만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그분께서 황소의 모습을 입고 소 떼에 섞여 / 음매 하고 울며 부드러운 풀 속을 폼 나게 돌아다닌다” 같은 시구와 함께 해당 신화를 이야기하면 한결 유쾌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장면이 연상된다. 즉, 당시 그리스·로마인들에게 신화는 우리가 지금 접하는 것처럼 건조한 텍스트가 아닌, 노래이자 시이고, 종교이며 유흥일 수 있다는 점을 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과 인물의 명칭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속에 해석의 열쇠가 담긴 또 다른 단서다. 고대 희랍어와 라틴어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자는 어원 분석을 통해 신화를 해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헤라클레스가 데이아네이라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유추해 낼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는 신화 속 여러 인물의 이름을 풀이해 가며 마치 낱말 퀴즈를 해결하듯 좀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국내에도 소개되어 있는 토머스 불핀치나 구스타브 슈바브의 저서들은 각각 영어권과 독어권을 대표하는 그리스·로마 신화 책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서들이 해당 문화권의 시각을 전제로 해석했다면 이 책은 국내 연구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그리스·로마 신화라 할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자리한 지역의 신화가 우리 고유 신화와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요소다. 목신인 판과 아폴론 신과의 연주 대결에서 판 신의 편을 들었다가 아폴론에 의해 길쭉한 귀를 갖게 된 미다스 왕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린 경문왕의 당나귀 귀 설화를 연상시킨다. 또한 해와 달을 대변하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전래되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와 비슷하다.

많은 나라들이 대체로 해는 남성으로, 달은 여성으로 본 반면에 독일 북부에서는 달의 신 마니(Mani)는 남성이고 해의 신 솔(Sol) 또는 순나(Sunna)는 여성이다. 하지만 해와 달을 남매 관계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독자들은 이러한 각 문화권에 얽힌 전승을 통해 그리스·로마 신화가 단순히 먼 타국의 신화 중 하나가 아니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권과 직간접적으로 유사성을 보이는 콘텐츠이자 인류의 근원적인 집단 무의식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신화를 재해석하는 인문학적 관점이 돋보이는 것도 이 책만의 장점이다. 저자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시작을 알리는 카오스를 설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아르케’를 이야기한다. 아르케는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 뒤로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카오스가 생겨나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고전에 관한 저자의 해박한 식견은 단순히 그리스·로마 신화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는 신화에서 등장하는 하데스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플라톤이 제시한 또 다른 사후 세계인 일명 에르 신화도 같이 이야기한다. 이 내용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등장하는데, 정의롭게 살던 사람들은 그들의 선한 행적을 띠에 적어 가슴에 달고 하늘로 올라가고, 못된 짓을 했던 사람들은 악한 행적을 적은 띠를 등에 달고 땅으로 난 구멍으로 떨어져 벌을 받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과 유사하다. 반면, 그렇게 하늘과 땅에서 천 년을 지낸 다음 다시 불려 와 운명의 여신 앞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 받는다는 점은 불교의 윤회설과 닮아 있다.

이처럼 저자는 단순히 흥미로운 신화를 소개하는 데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각 문화권에서 전승되는 설화 등을 깊이 있게 비교 설명함으로써 고대의 가치관과 철학을 다각도로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과 영웅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어떤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모두 인간의 본성을 비춰 주는 거울이자 전형적인 표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시간을 거슬러 오늘날에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고전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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