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금기와 피휘(避諱), 그리고 복잡한 인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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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금기와 피휘(避諱), 그리고 복잡한 인간사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2.04.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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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76)_ 사회적 금기와 피휘(避諱), 그리고 복잡한 인간사

 

인간은 모여 살면서 공동생활에 필요한 제도를 만들었다. 무분별한 언어사용에 대한 사회적 금기(禁忌)도 그중의 하나다. 조상이나 제왕 등 특별한 사람이나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공대어의 용례를 보면 과거 우리 사회에 얼마나 금기가 만연해 있었나를 알 수 있다. 극 공대말의 사례는 왕에게만 한정된 매화, 용안, 옥체, 수라, 성은, 망극 등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어휘들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면 존숭보다는 놀림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 그의 아들들을 천남생(泉男生), 천남건(泉男建) 등으로 기록한 것은 당(唐)나라를 세운 高祖의 이름 이연(李淵) 때문에 생긴 피휘(避諱) 혹은 기휘(忌諱) 해프닝이다. 남의 나라 사람 이름도 참견하는데 제 나라 사람 이름을 그냥 둘 리 없다. 도연명(陶淵明)도 도천명(陶泉明)이라고 고쳐 불리는 수모를 당했다. 이렇듯 임금이나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忌諱 현상은 금기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니 인간생활이 여간 복잡하고 힘든 게 아니다.

이름 없는 존재는 없다. 낙동강변의 도시 경남 김해에는 고대 가락국(駕洛國)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시아 북방 유목민들의 구전 설화와는 달리 우리나라 고대국가들의 시조 탄강설화는 대개 난생설화다. 김알지, 박혁거세, 고주몽, 수로왕이 하나같이 알에서 태어났다. 이들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간에 담긴 메시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명이든 국명이든, 인명이든, 관직명이든 명칭 내지 호칭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이름의 신구형, 자칭과 타칭을 살피는 일이 무척 재미있다.

가락국의 시조, 그러니까 金海 金氏의 시조 이름은 문헌에 따라 ‘首露’와 ‘首陵’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다. 만일 이를 단지 하나는 ‘수로’, 다른 하나는 ‘수릉’으로 읽고 만다면 이는 역사적 진실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실 두 어휘는 지시 대상이 동일한 이표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음운분석을 통해 양자가 다 같이 ‘태양’을 뜻하는 산스크리트 ‘surya’의 한자 음차어로서 ‘수리’라는 음가를 지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수리’라는 우리말이 ‘해’와 ‘라’와는 또 달리 산스크리트와 같은 남방언어에서 유입된 어휘, 즉 차용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면, 어휘 차용의 배경 등을 검토함으로서 미해결의 역사적 문제나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의 대상을 놓고 명칭이 달라지는 데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왔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가 그렇듯 피해는 영락없이 죄 없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우리의 경우 임진왜란은 섬나라 일본이 도발한 전란이었고, 병자호란은 청 태조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이끄는 만주벌의 오랑캐 여진족이 난입한 무도한 만행이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요즘 우리나라 언론에 매일같이 등장하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이름은 키이우다. 그러나 영어 명칭은 Kiev다. 몽골 지배하에서는 멘케르만 또는 만케르만이라고 불렸다. 아마 크림반도 일대를 지배하던 타타르족이나 킵착 몽골인들이 ‘위대한 도시’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9세기 중엽 바랑기 혹은 바랑고이라는 이름의 바이킹족이 지배 거점으로 삼으면서 형성된 이 도시 역시 민중의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명칭의 변모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女眞이라는 종족명은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하다. 그러나 한자어 女眞이라는 시니피앙(signifiant, 기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이와는 별도로 문헌에 따라 女眞이 女直, 女質을 넘어 려직(勵直), 려진(慮眞) 등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한술 더 떠 『요사(遼史)』 등의 사서는 “女眞의 본말은 주리진(朱里眞)인데, 번어(番語) 혹은 土語의 음 와전으로 朱里가 女로 변했다”고 전한다. 나로서는 이런 식의 기술에 익숙해져 있어 괜찮지만, 언어 현상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눈을 감거나 귀를 막고 싶은 말이나 글이지 싶다. 인내하고 끈덕지게 朱里와 女의 상관성 내지 동음성을 찾는 일은 학자의 몫이다.

하나의 소리를 두고 다양한 이표기가 존재하는 것은 물론 기록자의 우연한 선택 또는 임의적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본 다양한 말들이 단순히 동일한 어음의 이차자(異借字) 혹은 이표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遼史』, 『구조편년비요(九朝編年備要)』 권1 여진공마조(卷一 女真貢馬條) 등의 사서 기록을 검토해보면 女眞이라는 명칭이 기왕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史書에서 女直을 별도로 사용한 이면에는 국가 차원의 언어개입 혹은 정책적 결정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女眞을 女直이라 표기한 것은 이른바 피휘(避諱) 혹은 기휘(忌諱)라는 언어 사용에 대한 사회적 금기의 결과다.

女真本名朱里真土語舌音訛為女真或曰慮真避契丹諱又曰女直  
(여진의 본명은 주리진으로 토착어의 설음이 와전 되어 여진이 되었다. 혹은 慮真이라고도 하며 거란(황제)의 휘를 피해 女直이라고도 한다.)

 
요즘 생각으로는 어처구니없게 들리겠지만, 遼나라(916-1125년) 제4대 황제 흥종 야율종진(興宗 耶律宗眞)의 이름을 피하여 女眞을 女直으로 바꾸어 표기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聖人이나 皇帝, 집안의 祖先 이름은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금기인 피휘(避諱) 혹은 기휘(忌諱) 때문에 遼 興宗의 이름인 宗眞을 피휘하여 女眞의 眞을 유사한 음가의 直으로 바꿔 사용함으로서 女直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女眞과 女直은 동일음의 이표기일 뿐 별개의 의미를 지니는 상이한 어휘들이 아니다.

이처럼 알고 보면 자연과 인간, 先代와 後代, 그리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개방적이고 수평적이라고 알고 있던 유목민 사회에도 다채로운 기휘 습속이 존재한다. 과거에 몽골인들은 탕구트 지방을 카신(Qashin)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河西를 옮긴 말로 西夏의 근거지인 섬서, 감숙, 청해를 지칭했다. 그런데 몽골제국 제 2대 칸인 우구데이의 아들이 죽자 카신(Qashin)이라는 그의 이름이 피휘가 되어 그때부터 카신 지방을 다시 탕구트라고 불렀다. 사람은 참 복잡하게 산다.

색다른 경우도 있다. 아랍어 이름 핫산(Hassan)은 ‘미남’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이름의 애칭 후세인(Hussein)은 다양한 변이형으로 사용된다. Husein, Husain, Hussain, Husayin, Hussayin, Hüseyin, Huseyin, Husseyin, Huseyn, Hossain, Hossein, Husseyn, Ḥosayn, Hosayn, Hossein, Hussain 등이 그들이다. 다양한 변이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이름이 아랍인들, 특히 시아파 무슬림에게 친근하다는 의미다. 이 이름은 이슬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선지자 무하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손자를 ‘후사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알리의 아들 후사인)’로 칭하면서 최초로 등장했다. 후사인이 진짜 미남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은즉 때론 안경을 벗고 대상을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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