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론 … 중국과 한국 (4)
상태바
화이론 … 중국과 한국 (4)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2.03.27 16: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동일 칼럼]

중국은 ‘화이’(華夷)를 구분하는 화이론을 주장해왔다. 문명을 이룩한 자기네는 화(華)라고 하고 다른 민족은 미개한 오랑캐인 ‘이’(夷)라고 해왔다. ‘화’는 중국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이상이기도 한 이중의 의미를 가졌다. 

외침을 당해 중국의 자존심이 훼손될 때에는 유교문명의 이상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갖추고자 했다. 북송이 금나라에게 망하고 남쪽으로 피란한 남송의 주희(朱熹)가 그 선두에 서서, 화이론을 재확립했다. 주희를 나무라는 오늘날의 중국에서 그 유산을 중국중심주의의 논거로 삼는다. 

주희를 밀어내고, 지금은 왕부지(王夫之)를 가장 높이 받든다. 왕부지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시기에 세상을 구하는 도리를 찾으려고 진력했다. 유교의 다른 차등론은 모두 과감하게 비판하면서, 화이론은 더윽 분명하게 했다. 유교문명의 이상은 버리고 중국의 자존심에 매달려, 편벽되고 기이한 주장을 폈다. 

“중국과 이적은 군자와 소인이다”(中國夷狄也 君子小人也, <讀通鑑論> 권14 東晋哀帝 3)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심한 말을 했다. “중국은 이적을 죽여도 불인이 되지 않고, 속여도 불신이 되지 않고, 땅과 재물을 빼앗아도 불의가 되지 않는다”(中國之于夷狄 殄之不爲不仁 欺之不爲不信 斥其土奪其資不爲不義, <春秋家說> 권3 昭公 3)고 했다. 사실인가 의심할 수 있어, 원문과 그 출처를 분명하게 밝힌다.

화이론을 받아들여, 한국에서는 특수성은 버리고 보편성을 중요시했다. 중국의 자존심이 아닌,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이상으로 이해하고 존중했다. 중국의 독점물일 수 없고, 한국도 갖출 수 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더욱 빛낸다고 했다. 문명의 이상은 어느 하나가 아니고 각기 자기 나름대로 구현할 할 수 있다고 하는 대등론의 가치관을 제시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화’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고,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했다.(<中原碑>) 김부식(金富軾)은 ‘화’를 받아들여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노선을 분명하게 하고, ‘화’를 부정하고 ‘이’를 존숭하자는 반란을 진압했다. 이승휴(李承休)는 단군(檀君)이 ‘소중화’(小中華)의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帝王韻紀>) ‘화’의 자주적 연원을 말했다.

이황(李滉)은 “우리 동쪽에서는 기자가 책봉을 받고 온 이래로, 아홉 범주의 가르침을 베풀고 여덟 조항의 다스림이 있어, 어질고 슬기로운 교화가 신명과 저절로 호응했다”(吾東 自箕子來封 九疇設敎 八條爲治 仁賢之化 自應神明)고 하고, “‘화’를 사모해 ‘이’를 변혁한 것은 시서의 혜택이고, 예의의 풍조는 기자의 범주가 남긴 풍속이다”(慕華變夷 詩書之澤 禮義之風 箕疇遺俗)고 했다. (<回示詔使書>) 단군이 아닌 기자를 앞세워, ‘화’의 독자적 구현이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정조(正祖)는 “우리 동방은 비록 천지의 중심은 아니나 ’소화‘라는 호칭이 있다”(我東方 雖非天地之中 而粤有小華之稱)고 하고, “천년 뒤에 실제로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옮아 있다”(千載之下 實有吾道東之休) “미발의 시절을 ‘중’이라 하고, 이발의 경지를 ‘화’라고 한다”(未發底時節 謂之中 已發底光景 謂之和)는 가르침을 실현해, 누구나 중심을 잡고 화합을 실현하는 나라를 만들자고 했다. (<中 庭試殿試>)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선 것은 지적해 말하지 않으면서, ‘화’를 이룩하는 문명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한 것을 알고, 나라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모범이 되게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된 시기에, 유인석(柳麟錫)은 “사천 년 이래의 ‘동화국’, 오백 여년의 성스러운 시대 백성”(四千來歲東華國 五百餘年聖世民)이 치욕을 견디지 말고 “죽음만 있고 삶은 없는 상황이니, 충의 정신을 힘써 떨치자”(有死無生今日事 勉加忠義振精神)고 했다. (<諭告國中民人>) ‘동화국’임을 자부심의 근거로 삼고, 빼어난 정신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했다.

‘소화’(小華)나 ‘동화’(東華)라고 자처하면서 한국이 중국과 대등하고, 어느 면에서는  우월하다고 했다. ‘화’가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이상임을 확인하고, 그 의의를 존중하고 실현하고자 한 것을 평가해야 한다. 이것이 ‘화이론’에 대한 최상의 대응책은 아니다. 중국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다른 문명권은 무시하는 편협함이 있다. 
 
홍대용(洪大容)은 ‘화이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거기 대응하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했다. (<毉山問答>) “각각 그 사람과 친하고, 각기 그 임금을 높이며, 각기 그 나라를 지키고, 각기 그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화이’가 마찬가지이다”(各親其人 各尊其君 各守其國 各安其俗 華夷一也)라고 했다. 자기 나라의 관점에서 ‘화이’를 구분한 공자가 ‘이’라고 한 나라로 옮겨가면, ‘화이’를 뒤집어서 말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 이유를 밝혔다. 

모든 것은 안팎이 있다. 누구나 자기는 안이고, 다른 쪽은 밖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보면 안팎의 구별이 없으므로, 안팎이라고 하는 것이 균등하다. 이것을 내외균(內外均)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는 우월하고 상대방은 열등하다는 피아차(彼我差)는 부당하고, 내외균이 타당하다. 이렇게 말해 화이를 구분하는 차등론의 잘못을 내외균의 대등론으로 바로잡았다. 

홍대용은 더 나아가 초목은 초목의 윤리가 있고, 금수는 금수의 윤리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 사람만 윤리가 있다고 여기고 금수나 초목은 무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박지원(朴趾源)이 호랑이보다 사람이 더 나쁘다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虎叱>) 

차등론을 무너뜨리고 대등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등론이 더 강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차등론에 집착하는 강자는 반드시 망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대등론은 진실이고, 정의이다. 

이렇게 말하고 말 것은 아니다. 사람은 다른 생물보다 우월해 지배권을 행사한다고 하는 인간중심주의는 부당하다. 모든 생명은 대등하다고 하는 만생대등(萬生對等)이 올바른 철학이다. 화이론을 논란하다가 여기까지 이르렀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