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국민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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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국민의 뜻
  • 민경찬 논설고문/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 승인 2022.03.2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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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찬 칼럼]

지난 9일로서 20대 대선의 여정이 끝났다. 앞으로 대한민국 5년을 책임질 지도자가 결정된 것이다. 바로 이어서 ‘새 정부에 바란다’는 요구사항들이 여기저기 쏟아진다. 대통령 당선인이 앞으로 국가를 잘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도 발표되고 있다. 당선인은 오로지 국민만 믿고,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고 한다. 이는 사실 대선 후보자들의 공통적인 메시지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두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국가 지도자의 ‘책임 범위’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고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며, 행정부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여러 책무와 의무를 지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는 대통령 한 사람에게 5년간의 국가 경영에 대한 모든 것을 기대하며 무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것이 적절한 요구일까? 제왕적 대통령도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둘째는 ‘국민의 뜻’이다. 그런데 국민의 뜻이란 무엇인가? 선거운동 과정에 후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세 지역 주민들의 표를 얻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지역은 물론 유세에 참여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내용들이 ‘국민의 뜻’이 된다. 문제는 이 ‘뜻’이 다양하고 다르며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특히 국가 차원 또는 미래의 관점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도 많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CEO의 교체가 회사의 실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에 대한 연구가 있었는데, CEO의 중요성은 평균적으로 10~14%라는 결론이 나왔다. 리더 덕분에 회사의 실적이 좋아졌다고 말하기 힘든 수치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조지프 나이 석좌교수는 국제 사회의 리더를 볼 때 리더십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개인의 특성에 달렸고, 주변 맥락에 달렸는지 살펴보라고 권한다. 맥락에 따라 팔로워가 원하는 것이 변하게 되고, 이는 바로 리더십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1940년 1월 만해도 존재감이 없는 평의원이었다. 그런데 그 해 5월 영국군을 포함한 40만의 연합군 병력이 독일군에 의해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되는 등 절망적인 상황이 전개되자, 이러한 위기 가운데 영국 국민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히틀러를 막아줄 리더가 필요했는데, 처칠이 이에 적합한 리더로 부상하며 총리가 되고,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러나 1945년 7월 총선에서는 처칠은 낙선된다. 히틀러와 싸워야 할 리더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처칠이 변해서가 아니라, 환경, 즉 맥락이 변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한 지도자의 리더십은 그 개인의 특성, 맥락, 팔로워라는 세 가지 요소의 조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조지프 나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도 대통령 한 사람의 특성과 역량에 모든 것을 기대하며 국정 수행 지지도 등으로 평가만 하지 말고, 지도자와 함께 국민 모두가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며, 팔로워로서의 역할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 사회가 급변하는 세계 변화와 시대적 흐름 그리고 국가 전체에는 관심 두지 않고, 지역, 이념, 세대, 빈부, 노사 등 여러 갈래에서의 집단적 이익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나라가 어디로 갈까? 통상 정치하는 사람들은 표 계산하며 주변 요구에 맞춰나가려고 할 것이고, 공무원들은 이를 뒷받침하기 바쁘다면 우리는 물론 다음 세대까지 추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팬데믹 시대의 미래는 매우 빠르게 다가오며 양극화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틀에서의 맥락을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들이 대통령 당선인에게 가장 바라는 점은 통합과 국민화합, 협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4차 산업혁명의 기본 정신인 융합과 협업과 연계되는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과제는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운영 책임자들과 새로운 정책, 제도만으로 풀어갈 수 없다. 이 과제와 연계된 모든 사람들, 이들 간의 관계, 그리고 이들의 인식, 태도, 추구하는 가치 등에 달려있다. 특히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의 폭이 넓어지고 지향점이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 

이돈희 전 교육부장관은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성격상 갈등을 전제로 한다. 문제는 갈등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선적∙배타적인 사고와 행동이 지배하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원리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그 원리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 요구되는 능력과 기술을 익혀야 한다며 이에 대한 교육의 역할을 강조한다. 공동체가 어디로 가든 내 생각만이 옳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극한적 투쟁을 마다하지 않거나, ‘내로남불’처럼 같은 사안을 놓고도 나름의 프레임에 의해 괘씸과 기특으로 나누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가 여러 면에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통합, 화합, 협치’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지도자와 팔로워 모두의 몫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내 생각과 같아져야 한다거나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다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다름은 다양성을 만들어내며, 생태계에 역동성과 창의성을 자극한다. 다양성은 바로 4차 산업혁명에서 요구되는 기본 요소이며, 이에 기반을 둔 협업은 상상력, 창의력을 키운다. 

‘혁신(innovation)은 균형(balance)이다.’라는 말이 있다. 새 정부의 시작점에 서 있는 우리 모두는 리더십, 팔로워십, 맥락이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어가는 일에 마음과 지혜를 모아가야 한다. 국가 지도자의 책임과 역할이 우선 중요하지만, 건강한 팔로워가 요구되며, 지도자와 팔로워 모두가 맥락을 제대로 인식하고 공감하는 일도 중요하다. 

‘국민의 뜻’도 국가 지도자는 물론 우리 사회가 어떻게 잘 이해하고 또한 잘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만 국민이어서는 안 된다. 결국 서로에게 큰 상처와 손실을 가져다주는 어리석은 일이다. 국민은 모든 국민이어야 하되, 국내 다수의 의견이라는 여론만이 국민의 뜻일 수 없다. 18세기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소중함, 국내의 각종 형편과 상황 그리고 오늘과 다음 세대에 크게 영향을 주는 글로벌 환경과 미래 시대의 변화 등 외부 요소들을 읽으며 맥락을 찾아 지혜롭게 대처해나가야 한다. 국민의 뜻도 이러한 통합적인 시각에서 찾아야 한다. 


민경찬 논설고문/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연세대 수학과 명예교수로 연세대 대학원장, 대한수학회 회장, 국제퍼지시스템협회(IFSA) 집행이사, 교육과학기술부 정책자문위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과학기술분과 의장, 포스코청암재단 이사, 국무총리 소속 인사혁신추진위원회 민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과학자문위원회(SAB) 위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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