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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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단상(斷想)
  • 조호연 경남대·러시아사 
  • 승인 2022.03.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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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전 세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또 수많은 언론매체에는 이 전쟁에 대하여 보도하거나 분석하는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중에서 전쟁 발발 원인을 푸틴 대통령 개인의 독단적인 결정에서 찾으려는 관점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특히 푸틴이 최근 2년 동안 코로나로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편집증 증세로 전쟁을 도발했다고 보는 주장도 있는데, 이런 견해는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마치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히틀러에게만 한정하게 되면, 베르사유 체제와 경제공황 등 중요한 사건들이 2차 세계대전에 대해 가진 관련성을 간과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보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역사적 배경을 통하여 잘 분석할 수 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러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는 9세기에 성립된 키예프(키이우) 루시로서 오늘날의 유럽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을 무대로 하였다. 이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통치자인 블라디미르 대공은 988년에 기독교의 일파인 동방정교회를 국교로 수용하였는데, 푸틴 정부는 2016년에 크렘린궁 옆에 17미터 높이의 블라디미르 대공 동상을 세워놓을 정도로 자기들의 근본이 키예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키예프 루시는 11세기 중반에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었으나, 키예프는 여전히 “모든 루시 도시들의 어머니”라고 불렸다. 분열된 상태의 키예프 루시는 13세기 전반에 몽골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키예프는 온전한 건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이후에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몽골의 통치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모스크바국(國)이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러시아 역사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키예프 루시가 분열된 이후에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할리치나-볼린 공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성립되었다가, 1569년에 체결된 루블린 조약으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에 편입되었다. 이 국가는 17세기 초에는 모스크바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1613년에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후 안정을 되찾은 모스크바국에 의하여 점차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를 지도자로 하는 독립 세력이 폴란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1654년에 러시아와 페레야슬라프 협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로써 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서부 지역은 18세기 후반에 러시아제국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 함께 세 차례에 걸쳐 폴란드를 분할하면서 자연스럽게 러시아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NATO의 확대에 대한 러시아의 우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푸틴 자신도 전쟁 도발 이전부터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포기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해왔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몰락하여 냉전이 종식된 오늘날, 러시아는 왜 NATO에 대해 이토록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바로 체제의 성격이 상이한 데 있다. 러시아 제국은 예로부터 방대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하여 전제정 체제를 발달시켰다. 반면에 우크라이나 지역, 특히 드니프르 강 서쪽의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일찍부터 전제정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곳이다. 더구나 모스크바 중심의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러시아 농민들이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도망가서 코자크 집단이라고 불리는 자유로운 군사공동체를 구성하였다. 또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에서는 일찍부터 의회의 권한이 강하여 의회에서 만장일치제(liberum veto)가 채택되고 국왕도 선출될 정도였다. 이로써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전제정 체제가 강화되었던 반면에,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전제정을 거부하는 정서가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 중심의 전제정 체제는 소련 시기에도 형태만 달리할 뿐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정치적 토양에 깊게 뿌리박혀 있다.

201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빼앗은 크림지역의 역사도 그다지 간단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러시아가 이곳을 점령하여 불법적으로 합병했다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이곳은 러시아 땅도, 우크라이나 땅도 아니었다. 이곳에는 15세기 중반에 킵차크한국(몽골제국의 일부) 사람들이 세운 크림한국이 있었다. 이 국가는 주변의 두 강국이던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곤경을 겪다가, 18세기 후반에 결국 러시아 제국에 의하여 정복당하였다. 크림지역은 그 이후로 줄곧 러시아에 속해 있다가 소련 시기인 1954년에 흐루쇼프에 의하여 페레야슬라프 협정 체결 300주년 기념으로 우크라이나로 양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크림지역이 애초부터 우크라이나 영토가 아니라 러시아가 정복한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 역사를 살펴보자면,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이번 전쟁은 내전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미국 등 다른 국가가 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인들은 커다란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푸틴의 전쟁 도발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며, 지금이라도 공격을 멈추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발발된 것이므로 간단하게 마무리될 것 같지 않다. 푸틴이 권력을 잃더라도, 나중에 “또 다른 푸틴”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호연 경남대·러시아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국립사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러시아의 역사 (상/하)』, 『현대 세계의 인간 운명』, 『러시아 신분사』, 『유럽 근현대지성사』, 『역사관의 유형들』 등 러시아사 및 유럽사와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단독 혹은 공동으로 번역했으며, 주요 논문으로 「베르댜예프의 기독교적 사회사상」, 「상트페테르부르크 종교철학회의:러시아 교회사에서의 하나의 전환점」, 「1905년에서 1917년까지의 러시아 자유주의 연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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