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말
상태바
‘우리’라는 말
  • 조원형 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3.13 17: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원형 칼럼]

몇 년 전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내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한국어로 강의하는 수업이었는데 내 이야기 중에 무심코 ‘우리말’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의심 없이 써 왔던 이 말이 따지고 보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우리말’이라는 말을 하던 찰나에 내 시선은 외국인 학생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어인 한국어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 앞에서 한국어를 ‘우리말’이라고 부른 꼴이 되었으니 그 학생들은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한국어는 오랜 세월 동안 오직 한국인들만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러다 보니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한국어는 자연스럽게 ‘우리말’이 될 수 있었고, ‘우리나라’ 역시 오직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도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어를 쓰면서 활동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에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일은 이미 예삿일이 된 지 오래다.

그렇기에 이제는 ‘우리말’이나 ‘우리나라’ 같은 말이 꼭 한국어나 대한민국을 가리킨다는 보장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예컨대 독일어가 모어(母語)이면서 한국어를 배운 오스트리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말’이라는 한국어 단어는 독일어를 가리키는 말이 되고 ‘우리나라’는 오스트리아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우리말로는 ‘나무’를 ‘바움(Baum)’이라고 부릅니다.” 또는 “우리나라의 수도는 빈입니다.”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 만큼 불특정 다수 앞에서는 ‘우리말’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말을 신중하게 가려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청중이나 독자가 오직 한국인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한국어나 대한민국을 가리킬 때 이런 말을 쓰더라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일부 청중과 독자들에게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특히 논문과 같은 글에서는 더욱이 ‘우리나라’나 ‘우리말’이라는 말을 삼가야 한다. 논문은 전 세계의 연구자들에게 공개하는 글인 만큼 한국어로 쓴 논문이라 해도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유학을 온 사람도 많고 어떤 식으로든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어로 된 논문을 찾아 읽는 외국인들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력과 한국어 사용자들의 학술적 역량이 커질수록 이런 모습을 더욱 자주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생겨나는 한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일 수도 있고 중국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다. ‘우리말’은 한국어일 수도 있고 독일어일 수도 있고 아랍어일 수도 있다. ‘my country’나 ‘our country’가 한국인에게는 대한민국이고 프랑스인에게는 프랑스인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와 ‘우리말’이 ‘대한민국’이나 ‘한국어’보다 좀 더 가깝고 친근하게 들리기 때문에 이 말들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 말도 물론 일리가 있다. 자기 나라 이름이나 자기가 쓰는 언어 이름을 마치 제삼자를 가리키듯이 객관적인 단어로 지칭하기보다 ‘우리’의 나라요 ‘우리’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오직 대한민국과 한국어뿐이 아니라 그보다 더 넓은 세상에 사는 더 다양한 사람들과 이들이 쓰는 다양한 언어들을 일컬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커진 말이 되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만 있을 때는 ‘우리말’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말을 편안하게 쓰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을 ‘더 큰 우리’로 맞이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우리’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역설을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좋겠다.


조원형 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박사학위논문),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