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金閼智)는 김아기? 알지 … 아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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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金閼智)는 김아기? 알지 … 아지, 아기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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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6)_ 金閼智의 본명이 궁금하다
▲ 김알지 탄생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경주 계림
▲ 김알지 탄생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경주 계림

20년 전쯤 강릉시 호적계에 문의한 결과 강릉 지역에 ‘아지’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할머니들이 세 분 생존해 계신 걸 알았다. 그런 사실을 집사람에게 얘기하니 박장대소하며, 처조모 즉 집사람 친할머니의 名字가 아지요, 외조모도 그러하시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한 분은 박아지, 또 다른 한 분은 송아지이셨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여자 이름이 하필이면 왜 송아지, 박아지야?”라며 터지는 웃음을 감당 못 할 것이다. 정아지는 좀 덜 하지만 강아지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분도 어디 가서 자신을 밝히기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강아름, 강미리 등의 아리따운 이름이 많고도 많은데, 구태여 강아지라고 작명하신 아버지나 집안 어른들의 ‘생각 없음’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예쁜 딸을 낳아 놓고 하프를 닮은 고대 그리스의 작은 현악기 리라(lyra)의 이름을 따서 붙인다면, 인간인 그 딸이 무슨 죄가 있어 평생 유인원 ‘고리라’로 살아야 할까?

그런데 이름을 밝혀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바가지로 들릴 게 뻔한 이름을 말하기 쑥스럽고, 듣는 사람은 농담일 거라 믿으면서도 물바가지(< 물 박+아지), 쌀바가지가 연상되어 웃을 수밖에 없는 ‘박아지’의 ‘아지’는 알고 보면 귀하고 격조 있는 이름이다. 왜일까? ‘아지’의 기원과 사용례를 살펴본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말 속의 ‘아지’는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로 쓰인다. 지소사는 어떤 낱말에 덧붙어서 그 말보다 더 작은 개념이나 친애의 감정을 나타내는 접사(接辭)다. 다시 말해 아기나 짐승의 어린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소의 새끼는 송아지[<숑아지 독(犢)], 새끼 개는 강아지, 작은 말은 망아지[<ㅁㆍ야지 구(駒)], 돼지(도치) 새끼는 도야지가 되었다. ‘아지’가 붙은 말이 다 좋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모가지(<목+아지), 손모가지(<손목+아지), 발모가지(<발목+아지), 싸가지(<싹+아지)는 오히려 경멸조의 비속어다.

우연치고는 공교롭게도 친가와 외가 할머니 두 분의 함자가 다 같이 ‘아지’인 점이 재미있고 궁금하기도 하여, 집사람은 ‘아지’라는 말의 뜻을 알 법한 사람을 만나면 ‘아지’의 의미에 대해 묻곤 했다고 한다. 여고시절 유난히 잘 대해주셨던 국어 선생님께도 진지하게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집사람의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일순 당황해하셨다고. 그리고 잘 생각이 안 난다며 나중에 찾아보고 알려주겠다고 하셨다는데, 그 후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집사람도 구태여 다시 물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 지나며 송아지, 박아지 할머니 말고도 정아지, 강아지라는 분들도 있었음을 알게 되고 나서는 나도 더 이상 할머니들의 웃기는 이름 ‘아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에 여아의 이름으로 흔하게 쓰이던 ‘아지’가 근자에 이르러서는 ‘작명’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비록 옛날과는 달리 ‘아지’를 귀한 내 ‘새끼’(자식)의 이름으로 선택하는 어버이가 없지만, 본래 ‘아지’는 “고귀한 존재(the noble)”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 ‘아지’라는 말의 의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가치나 중요성도 지니지 않겠지만, 작명관습이나 작명방식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 말이 김알지(金閼智)의 ‘閼智’와 맥을 같이하고 또 흉노 선우의 부인을 지칭하는 ‘閼氏’(讀音: 연지)와도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하기에 무한 매력을 지닌 보석 같은 말이다.

▲ 삼국유사  서울규장각본
▲ 삼국유사 서울규장각본

일연 스님이 쓴 『三國遺事』를 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출현 장면에 예상치 않게도 ‘閼智’가 등장한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 알에서 나온 이름이 혁거세왕 혹은 불구내왕이 스스로를 ‘閼智居西干’이라 칭한다는 대목이다.

양산(楊山) 밑자락에 나정(蘿井: 무 ‘라’/무 또는 미나리)이 있는데, 그 곁에 백마가 품었거나 어디선가 물고 온 듯 보이는 자줏빛 또는 청색 큰 알이 놓여 있어 사람들이 궁금하여 알을 갈라보니 그 안에 形容(생김새)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童男이 있었다. 아이를 東川에서 목욕을 시키고 보니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니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나더라.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아마도 향언(鄕言)일 것이다. 이 이름은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王號(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신을 일컬어 말하기를 알지거서간일기(閼智居西干一起, 알지거서간과 함께)라 했으므로, 그의 말에 따라 이렇게 불렀으니 이로부터 임금(王者)의 존칭으로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閼智라고 하면 金閼智를 떠올리며 고유명사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사용된 閼智는 맥락상 ‘지존’이나 ‘존귀’ 또는‘大’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따라서 “閼智居西干一起‘는 “나는 알지거서간 즉 大王者다. 나와 함께 (이 땅을 잘 다스려보자)”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閼智는 성별에 상관없이 흔하게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閼智의 처음 소리값은 ‘알지’거나 ‘아지’였겠지만,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아지’ 또는 ‘아기’로, 궁중의 왕자나 공주, 옹주 등을 지칭하는 높임말로 쓰일 때는 ‘씨’를 덧붙인 ‘아기씨’의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閼智의 의미에 대해 『三國遺事』는 “알지는 향언으로 어린아이를 가리킨다(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고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헌에는 어린아이를 일컫는 말로 閼智와 더불어 阿只ㆍ牙只ㆍ岳只 등이 쓰였는데(阿只方言 小兒之稱/중종실록23: 28), 이것의 음가가 ‘아지’ 또는 ‘아기’로 나타난다. 그래서 아기씨(阿只氏)ㆍ자근아기(者斤阿只)ㆍ아기련(阿只連)ㆍ대아기(大阿只 또는 大岳只)ㆍ아지발도(阿只拔都/왜구의 이름) 같은 이름이 존재했다.

이렇게 되면 閼智는 박아지, 강아지, 송아지 등의 할머니 이름으로 남아있는가 하면, 어린 아기, 새아기, 아기씨, 작은 아기 등에서 보듯 의미 자질로 ‘고귀함’을 간직한 어휘로 전승되어 우리 곁에 머물러있다. 그렇다면 탈해 니사금 때 태어났고, 그의 7대 손 미추 니사금이 김 씨 최초로 왕위에 오른 김알지의 이름은 달리 찾거나 김아기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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