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 대학 안과 밖의 새로운 ‘정치’를 위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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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 대학 안과 밖의 새로운 ‘정치’를 위한 희망
  •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
  • 승인 2022.03.06 2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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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준 칼럼]

2022년 3월, 퇴행적 군사패권주의에 근거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 분노와 우울을 불러오는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지만, 대학은 팬데믹과 엔데믹의 사이 지점에서 2년 만에 면대면 수업을 시작해 이전의 활기가 찾아오고 있다. 대학 밖에서는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세평과 더불어 적대적 공생권력 비판과 다당제 정당정치라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면서도 10년이 넘도록 단일화 놀이를 한 대선 후보가 퇴장하는 한국 정치 질서와 문화의 우울한 현주소를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민들은 사전투표 인증사진과 더불어 ‘소중한 한 표와 시민의 권리, 더 나은 정치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어느 사회보다도 전투적이고 소비적인 정치담론이 과잉 생산되는 사회이지만, 시민에 의한 정치변혁의 경험을 가진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하는 것은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희망과 기대가 강하다는 것은 목마름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비록 그, 목마름이 가져온 책임의 일부도 시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시민은 하위정치(subpolitics)의 행위자이자 정당정치의 소박하고 낭만적인 소비자로서 부르고 싶은 희망 노래이다. 

전국노래자랑의 배우가 되어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과 그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생각해 봐야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중립적 진술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세련된 정치공학자들이나 정치꾼, 정치 마케터, 싸구려 당파적 지식인 그리고 폴리페서들의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이해조합의 예술’이라는 정치 심미화 논리는 잊자. 그와 같은 주장은 지역주의 정치, 시스템이 아닌 사람중심 정치, 정당민주주의가 선택적으로만 작동하는 빈곤한 정당문화, 정당 사이와 정당 내의 기준 없는 임의적 나눠먹기가 빈번히 연출되고 편향 확증을 증폭시키는 당파적 지식인들의 준정치 행위에 구토하지 않는 정치소비 문화를 포장하는 건조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적어도 위와 같은 현상들이 주관적 판단의 요소를 넘어 사실을 반영한 진실이 일부라도 있다면, 우리는 정치를 아렌트가 간파했듯이 “힘과 폭력이 아닌 말과 설득을 통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말과 설득은 시민적 삶과 관련된 모든 이슈들에 대한 논의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 이데올로기와 상징조작, 가짜 뉴스의 생산·유포, 댓글 전사 육성·관리로 시민의 눈을 가리고, 이미지 정치와 폴리테인먼트로 정치 좀비를 양산하지 않는, 시민을 시민 되게 해야 한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 정치적 주체로서 자유롭게 말하고 행위 하게 하며 이해-판단-대화-상호 설득과 협력의 장인 공적 영역을 전제로 한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그것 이상이 없다. 기성정치를 자극, 긴장, 비판하는 시민사회의 하위정치를 활성화하도록 공적 영역을 확장하고 제대로 작동되도록 하는 것이 정치인의 진정한 역할이다. 

간단히 말해 ‘말하게 하고, 행위 하게 하는 것’이 현대정치에서 정치인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플라톤이 메타포를 통해 말했던 ‘화가’ 같은 정치가, ‘최고의 조타수’로서의 정치가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최고의 정치가로 간주한 늑대와 같은 야수성과 여우와 같은 지략을 겸비한 정치가가 필요한 시대는 더더욱 아니다. 제도적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으나 삶의 민주주의, 생활민주주의, 질적 민주주의가 요원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부의 탄생에 즈음에 가슴 깊이 부르고 싶은 희망가는 바로 시민 한 사람의 생각, 의지, 판단과 ‘행위’하는 장(場)의 파수꾼에 관한 노래이다. 

대학 사회에서의 정치는 어떠한가? 머지않은 엔데믹을 기다리며 면대면으로 시작하는 2022년 1학기는 대학 구성원 누구에게나 가벼운 긴장과 가슴을 뛰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이 또 대학 밖의 환경이 어제와 구별되는 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게 만든다. 대학 사회에서 정치도 대학 밖의 정치와 다르지 않다. 대학을 구성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행위’하게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정치란 학생, 조교, 강사, 초빙교수, 겸임교수, 비정년 전임교수들의 생각, 판단, 의지를 춤추게 하도록 공론의 장과 공적 영역을 만들어 지켜주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아서 참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등록금 동결로 인한 대학 재정의 어려움에 대한 관대한 이해력을 갖고 고통을 분담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박수라는 도덕적 보상과 방치라는 아름다운 배려를 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정치행위지만, 대학에서 일어나야 하는 ‘좋은 정치행위’는 아니다. 

대학 안이나 대학 밖이나 정치기술자는 많다. 그러나 진정한 정치가를 보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만큼이나 찾기 어렵다. 인류사를 돌이켜 보건대 신은 고맙게도 낙타를 멸종시키지 않았다. 희망을 노래하는 마음을 빼앗지도 않았고 희망을 노래하게 만드는 환경을 제거하지도 않았다. 와우~ 신은 정말 엄청난 정치를 한다. 모든 것을 인간 종에게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라는 임의성의 예술을 창조하게 하는 그는 놀랍도록 위대한 정치가이다. 그러나 인간 종이 알아야 할 것은 위대한 정치가인 신은 홀로 정치가이고 인간 종의 정치는 운명적으로 ‘같이 하는 정치’라는 것이다. 인간 종의 정치는 신의 정치보다 더 복잡한 게임의 정치이며 책임비율의 정치이다. 양육강식의 자연 논리와 유사 신사협정이 애매하게 조합된 묘한 게임이 인간 종의 정치이고, 대학 안과 대학 밖의 정치이다. 분명한 것은 정치 비즈니스도 아니고, 죽은 정치도 아니고 ‘찐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찐 정치’는 ‘같이 하는 정치’이며 그것이 때론 인간을 서로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게 한다는 것이다. 기적을 좇지 말고 찐 정치를 하라. 천박한 실용 이성아, 입이 근질거리지? “현실정치와 요청으로서의 정치는 다른 겁니다, 엄밀히 말해서요”라고 포장하며 물타기 하지 말고, 베버가 노래한 <직업으로서의 정치> 후렴 열심히 불러~. 참고로 그 노래의 후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정치의 정신이고 정치가의 태도이징, 오, 예에~!”로 끝난다. 

정치의 계절에 정치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이 정치에 대한 희망의 본질은 지금, 여기,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와 인류 삶의 다른 가능성에 대한 깊은 동경에서 시작된다. 생산적 허무와 전투적 인식으로서 동경이 멈추는 날, 희망을 품지 않게 될 때, 정치는 하나의 축제가 될 것이다.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한남대학교 탈메이지교양교육대학 철학교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아도르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한국동서철학회 부회장, 대전인문예술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교수신문, 금강일보 등에서 칼럼을 쓴 바 있고 <대학지성 IN&OUT>의 편집기획위원이며 고정칼럼을 연재 중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 전문 연구자로서 연구서인 <부정과 유토피아>(2019), <아도르노의 문화철학>(2007),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2011)을 저술했고 소개서로는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2007), <막스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2016)을 썼다. 이 밖에 세종우수학술도서와 세종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책을 포함 다수의 인문교양 도서와 공저를 출간했으며 60여 편의 전문 학술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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