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과 결백의 삶을 담은 안동 만휴정(晩休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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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과 결백의 삶을 담은 안동 만휴정(晩休亭)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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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 경북 안동 묵계리 만휴정

 

               보백당 김계행이 말년에 지은 만휴정. ‘안동 만휴정 원림’은 명승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동 길안면 묵계리 마을 표석 앞에 버스 정류장은 있고 또 없다. 있다가 사라진 것인지, 세우다 그만둔 것인지, 애초에 그것이 전부인지, 낮은 시멘트 기단만이 덩그러니 누워 있다. 그 속에서 두 개의 의자가 나란히 늙어간다. 이들 앞에, 버스는 어쩌면 매번 멈출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 만휴(晩休)의 소일거리, 나는 그들에게 길을 묻는다. 그들은 그들의 등 뒤로 투명한 암막처럼 늘어서 있는 키 큰 수목들의 숲을 가리킨다. 좋은 것은 대개 감춰져 있는 법이지.

 

                 묵계리 마을 앞. 뒤편으로 보이는 마을 숲 너머 길안천이 흐르고 그 너머가 하리다.

숲은 가장 아름다운 빛의 형상으로 펼쳐져 있다. 그들 너머에는 길안천이 환하다. 천을 건너면 묵계리의 자연마을인 하리가 조그맣게 나타난다. 마을의 늙은 돌담길을 잠시 걸어 돌 많은 계류를 건넌다. 하얗게 언 계곡물이 작고 먹먹한 소리를 낸다. 그로부터 다섯 걸음 만에 산으로 든다. 계곡은 순식간에 깊어지고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 쌍의 남녀가 내려온다. 미소를 머금어 볼이 불룩하다. 곧,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보인다. 송암폭포(松岩瀑布)다. 폭포도 소도 모두 하얗게 얼었다. 얼음 폭포 위에 정자가 앉아 있다. 만휴정(晩休亭)이다. 이 계곡은 임봉산의 북쪽 자락으로 원래 송암동(松巖洞) 계곡이었다. 소나무와 바위가 많은 계곡의 모습 그대로의 이름이었다. 연산군 때인 1500년 초,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이 이곳에 만휴정을 짓고는 계곡을 묵계(黙溪)라 불렀다 한다. ‘조용한 계곡’이다. 베일 같은 얼음장 아래서 흐르는 낮은 물소리,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새들의 높은 울음소리. 이들로 인해 정적은 한결 더 깊어진다.       

 

                    묵계의 송암폭포. 원래는 송암계곡이라 하였으며 폭포 위에 만휴정이 자리한다.

김계행은 안동 풍산읍 사람으로 고려 개국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김선평(金宣平)의 후예다. 세종 29년인 1447년에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입학해 김종직(金宗直)과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후 충주향교 교수 등을 지냈고 40대 중반에는 고향집에 머물며 김종직과 우의를 다졌다. 그는 49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그는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다고 전한다. 김종직과의 인연으로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는 태장을 맞고 석방됐고, 70세 되던 해에는 연산군이 다시 지난 사건을 들추어 5개월 동안 옥살이를 겪기도 했다. 만휴정을 지었을 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옥살이 후 시대의 문란과 폐단을 버리고 낙향한 이듬해다. 

 

묵계를 가로지르는 다리 끝에는 좁고 낮은 일각문이 열려 있다. 몸을 굽혀 안으로 들어서면 싸리 빗자루 모양으로 선 열녀목이 하늘을 가리킨다.

정자는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좁고 긴 다리 너머 바위 절벽에 둘러싸여 있다. 다리는 통나무 네 개 정도를 나란히 놓아 야박하지 않은 너비다. 윗면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다. 다리 끝에는 좁고 낮은 일각문이 열려 있다. 몸을 굽혀 안으로 들어서면 싸리 빗자루 모양으로 선 열녀목이 하늘을 가리킨다. 왼쪽에 작은 화장실이 있고 오른쪽에 만휴정이 위치한다. 

 

       만휴정과 쌍청헌 현판. 방문 위에는 ‘지신근신대인충후’와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편액이 걸려 있다. 
‘우리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이 있을 뿐이다.’ 김계행의 호 보백당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보백당의 유훈. ‘몸가짐을 삼가고, 남을 대할 때는 진실하라.’

만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정면은 계자난간을 두른 누마루로 열려 있고 뒷면 가운데는 대청,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왼쪽 방문 위에는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唯淸白)’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나의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이 있을 뿐이다’라는 뜻이다. 그의 호 보백당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오른쪽 방문 위에는 ‘지신근신(持身勤愼) 대인충후(待人忠厚)'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몸가짐을 삼가고, 남을 대할 때는 진실하라’는 뜻이다. 이는 김계행이 81세 되던 해 가족과 친척들에게 남긴 말로 이후 후손들이 새긴 것이다. 대청 안에는 쌍청헌(雙淸軒) 현판이 걸려 있다. 쌍청헌은 김계행의 장인인 남상치(南尙致)의 당호다. 남상치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쌍청헌을 짓고 은일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쌍청이란 ‘맑은 것 두 가지’로 맑은 바람(淸風)과 밝은 달(明月)을 의미한다. 김계행은 쌍청헌이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만휴정이라 했다. ‘늦게 얻은 휴식’이다. 처음에는 초당이었다고 한다. 

                               묵계의 너럭바위에도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이 새겨져 있다. 

석축에 기댄 돌계단이 계곡으로 내려선다. 계곡 위는 대단히 너른 암반이다. 바위에도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각자가 있다. 물줄기는 암반을 타고 각자를 빗겨 흘러 내려와 소를 이루고, 다시 다리 아래를 천천히 흘러 몸을 비틀어 폭포로 쏟아진다. 탄탄하면서도 약간은 두려움을 주는 이 다리 위로, 가끔씩 불쑥 떠오를만한 사랑이야기가 스쳐갔다.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남녀는 이 다리 위에 마주 섰었다. “합시다 러브, 나랑, 나랑 같이.” 그리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 이전에는 조선 세조 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저 너른 암반에 앉은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시(詩)를 나누며 사랑을 확인했다. 묵계는 그렇게 한동안 들썩였다. 

기와를 얹은 토석담은 만휴정 툇마루보다 낮다. 밖을 내다보면 묵계의 흰 바위에 새겨진 ‘보백당만휴정천석’이 보인다. 

김계행은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고 묘비에는 미사여구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 만휴정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1750년경 보백당의 9세손인 묵은재(黙隱齋) 김영(金泳)이 중수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터만 닦아 놓은 채 둘째 아들 김동도(金東道)에게 만휴정 중수를 완성할 것을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동도는 1790년 2월 토대를 구축하고, 3월 22일 기둥을 세우고, 3월 30일 상량하여 마침내 만휴정을 다시 지었다. 기와를 얹은 토석담은 만휴정 툇마루보다 낮다. 밖을 내다보면 묵계의 흰 바위에 새겨진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 보인다. ‘보백당의 만휴정이 자리한 샘가의 돌’이다. 은거의 20여 년, 가슴에 담은 것은 바람과 달이었고 만휴의 벗은 샘과 돌이었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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