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도시〉와 화가 손상기, 그리고 선거
상태바
〈공작도시〉와 화가 손상기, 그리고 선거
  •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 승인 2022.03.06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은영 칼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내세운 계명이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낙원사회를 표방한 동물 지도층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제창했으나, 종국에는 “더욱” 평등한 지배자들의 특권수호를 위해 교묘하게 수정되었다. 

얼마 전 JTBC 드라마 <공작도시>가 방영됐다. 매번 챙겨보지는 못했다. 코로나 상황과 대선정국에 온 나라가 느와르 장르 같은지라, TV에서는 유사 장르를 피하게 된다. <공작도시>처럼 정계·재계·언론계의 끈끈한 결탁 관계, 그 공교한 체계를 이용하는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과 비정한 암투, 인기몰이 수식어 범벅인 정치구호, 그러한 자유경제 민주사회의 부조리에 피폐해진 ‘2등 시민들’을 다룬 드라마는 현 시국에는 시의적절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연히 돌린 채널을 고정시킨 것은 화면 속 그림이었다. 화가 손상기(1949~88)의 <공작도시> 연작이다. 손상기의 작품, 그리고 딸 손세동(필명) 각본의 동명 드라마에는 ‘더욱 평등한’ 사회지도층과 '그저 평등한' 일반시민층, 그리고 ‘덜 평등한’ 소외층이 등장한다.

모든 예술이 채널을 멈추는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이 일상에 쫓기는 빠른 발걸음을 붙잡지는 못한다. 어릴 적 다친 척추 장애와 질병과 가난 끝에 단명한 화가 손상기의 <공작도시> 등 그림들에 담긴 거대도시 서울의 그늘진 이면은 스치는 시선을 붙드는 힘에서 이례적이다. 현대예술사에 족적을 남길 만큼 위대한 재능을 발휘하다가 하필 전성기에 재능보다 돈과 인기를 훨씬 선호한 ‘천재가 될 뻔한’ 작가들, 곧 세속적 성공이 예술성을 망친 경우는 부지기수다. 마찬가지로 공익과 진정성보다는 성공의 무한궤도에서 권력, 돈, 인기영합을 좇다가 역사적 명망을 잃는 이들은 드라마 <공작도시> 마냥 정계·재계·언론계에도 수두룩하다. 부와 권력 암투의 주역인 메디치가문이 르네상스 문화예술의 수호자로서 불후의 명성을 쟁취한 과정이 새삼 되새겨진다. 

정치적·사회적 프로파간다를 넘어서 공작도시의 음지를 시리고 매섭게 표현한 손상기는 이 점에서 다행스럽다. 39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자신의 비판 대상과 영합할 기회가 적었을 수도 있다. 교육 현장을 포함한 도처에서 돈과 권력의 가치를 부단히 강조하며, 소위 공작도시 체제 편승을 성공요건으로 삼는 사회의 폐해를 날카롭게 해부한 그는 흔히 ‘한국의 로트렉’으로 칭해지지만 구태여 비유하자면, 사회비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 어린 시각 및 표현기법이 ‘한국의 벤 샨’에 가깝다고 하겠다. 벤 샨이 없었다면 손상기를 글로벌 미술계에 부각시키기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드라마 <공작도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어쭙잖은 권선징악과 정의구현식의 해피엔드로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34년 전에 작고한 손상기의 <공작도시>는 여전히 침묵으로 외치고 있다. 그가 웅변하는 사회 병폐가 여실하기에, 그의 그림이 주는 통증도 유효하다. 필자가 재직 중인 대학에 재학했던 손상기가 가난과 질병과 싸우며 쪽잠 자고, 먹고, 작업했던 같은 건물에서 현재 그의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맞닥뜨리는 사회적 책무감이 무겁다. 게다가 학령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화로 인해 ‘대학들의 오징어게임’에 내몰린 예술대학들의 소멸, 그리고 뒤따를 지역 예술의 황폐화 위기는 이 무게감을 가중시킨다. 정부의 ‘한국문화예술 세계화’와 ‘K-컬처’ 기치가 무색하게, 정작 이를 계승, 확산해야 할 예술대학들은 일부 수도권 대학과 지역거점국립대를 제외하고 사라질 터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대 관계자들과 함께 가진 대책회의에 지난주에도 다녀왔지만, 아직 이를 산은 높고, 건널 골은 깊다. 이번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선출될 대통령과 지자체장, 그리고 정당을 떠나 정치인들의 시기적절한 정책이 요원한 상황이다. 온갖 인기몰이 정책의 점검과 정리, 그리고 공작도시로 도태되지 않을 정책 수립이 절실하다. “나이 오십이 되면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얼굴이 된다.” 조지 오웰의 또 다른 말이다. 우리가 민주사회를 표방한 지 나이 오십이 익히 지났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얼굴에 맞는 대표 얼굴이 드러날 것이다. <공작도시>를 넘어서는 지도자와 정책을 기대하기에는 아직 섣부른가.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미국 델라웨어대학(University of Delaware)에서 미술사 석사와 박사 학위 취득. 국립 스미소니언박물관 Fellow와 국제학술자문위원, 미국 국립인문진흥재단(NEH)과 루스(Luce)재단 Fellow, 중국 연변대학 객좌교수, 일본 동지사대학 국제대학원 강의교수를 거쳤으며, 국내에서 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원광대 평생교육원장, 대외협력처장, 국제교류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원광대 조형예술디자인대학 미술과 교수로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위원 등을 맡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