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 관계 … 중국과 한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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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봉 관계 … 중국과 한국 (3)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3.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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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중국은 중심부이고, 한국은 중간부이다. 월남은 한국과 함께 중간부이고, 일본은 주변부이다. 중국은 중심부여서 그 통치자가 천자(天子) 노릇을 하면서 중간부나 주변부의 통치자들을 국왕(國王)이라고 책봉했다. 이런 책봉체제는 중세문명권 어디에나 있었다. 중세인은 보편종교가 무엇이든 천상의 지배자가 지상의 지배자와 한 가닥으로 연결된다고 여기고, 연결의 임무를 대제사장이 맡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천자, 칼리파, 교황 등으로 일컬어지는 대제사장의 종교적 임무는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정치적 실권은 그렇지 않아, 기독교의 천자인 교황에게는 없고, 이슬람의 천자인 칼리파에게는 없기도 하고 있기도 했는데, 유교의 천자는 계속 지녔던 것은 서로 달랐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의 책봉은 강대국의 정치적 지배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의 국왕이 중국 천자의 책봉을 받은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굴욕이라고 여긴다.    
 
중세인은 근대인과 달라, 책봉의 종교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국왕이 책봉을 받아야 하늘의 도리인 천도(天道)를 지상에 실현하는 공식적인 자격을 가진다고 여겼다. 또한 책봉이 아닌 다른 외교 관계는 없었다. 책봉체제는 문명권의 기본 질서를 이루는 불가결한 구실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잘 유지된 것은 아니다.   

월남은 중국 명나라의 침략군을 괴멸시키는 승리를 거두고, 책봉 관계를 되찾았다. “封帝爲安南王”이라고 <대월사기>(大越史記)에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이 말은 “천자가 월남의 황제를 책봉해 안남왕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안남 즉 월남의 통치자는 나라 안에서 황제라고 일컬어도, 천자의 책봉을 받아 안남왕이라고 공인되어 대외적인 활동을 했다. 

자국의 통치자를 무어라고 하는가는 나라에 따라 달랐으나, 천자의 책봉이 필요한 것은 같았다. 칸(干)이라고 하는 북방 민족의 통치자는 이따금 무력으로 협박해 천자의 책봉을 받아냈다. 장군(將軍, 쇼군)이라고 하는 일본의 통치자도 천자의 책봉을 계속 받다가, 임진왜란 때의 잘못 때문에 거절당해, 일본국왕이라고 행세하지 못하고 국제관계에서 고립되었다. 

한국의 통치자는 아무 파탄 없이 책봉을 계속 받아 책봉체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모범이 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책봉을 하는 쪽이 한국을 각별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렇게 하도록 만든 외교적인 노력 덕분이다. 한국은 문인이 하는 외교가 무인의 전투보다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데 더 큰 기여를 한다고 입증해, 무인의 득세를 막고 수를 줄이는 다른 어디서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인구 비례 군인의 수가 가장 적어 농민은 자기 몫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었다. 관군이 약체인 덕분에 의병이 일어나는 것도 남달랐다.

중국이 문명권의 중심부여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그 반대였다. 하늘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는 천자이기도 한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법도를 무시하고 지나친 횡포를 자행하는 추태가 이어졌다. 그런 권력을 황후도 나누어 가지고 엽기적인 만행을 저지르곤 했다. 황제나 황후와 가까운 관계를 가진 환관들도 월권을 일삼으면서 횡포를 자행했다. 권신들도 탐욕을 부려 국정 파탄을 일으키고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예사였다. 

유교의 대제사장 노릇을 하는 천자의 나라가 유교의 이상을 심하게 유린하는 자기모순을 보여주었다. 패권주의 전제정치의 결함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노출했다. 유교문명의 이상을 구현하는 책봉체제는 세계에 내놓을 동아시아의 자랑이지만, 그 중심에서 저지른 중국의 배신은 누구나 극력 나무라지 않을 수 없는 추태였다. 둘 사이에 심한 괴리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배신의 추태가 횡포를 자아내 왕조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막판에는 으레 민란이 일어나 전국이 대혼란에 빠졌다. 민란의 주모자들이 황제라고 하는 나라가 난립하다가, 덜 무도한 쪽이 승세를 잡고 다음 왕조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백성은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중국 대륙 그 넓은 땅에 시체가 즐비하게 누운 광경이 자주 재현되었다. 내전 승리자가 권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다시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한국에서는 왕조의 수명이 중국의 배 이상이고, 교체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선양(禪讓)의 이상을 근접되게 실현했다. 중국에서 배신하고 손상시킨 유교를 한국에서 살려냈다. 국왕이 법도를 지켜 무리한 짓을 하지 않고, 신하들의 견제나 감시를 받았다. 왕후나 환관의 횡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은 후진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조심해 선진으로 나아갔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국왕이 덕행의 모범을 보일 것을 더욱 철저하게 요구했다. 모든 동정을 기록에 올려 실록의 자료로 삼고, 후대 사가의 평가를 받도록 했다. 국왕이 잘못하면 대간의 규탄을 받고, 초야의 선비들도 상소를 올려 나무랐다. 

중국은 통치자의 권력이 너무 커서 차등이 극대화된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한국은 통치자와 백성과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적고, 민본(民本)의 정치를 한다고 표방했다. 수탈이 심해 살 수 없다는 비판이나 항변이 많은 것은 더 불행했던 실상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대등을 지향하는 의식이 더 깨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통치자의 권력을 극대화해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힘이 커진다고 여기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밖으로 강성하게 보이는 것만큼 안이 멍들어 활력을 잃는다. 통치자가 자세를 낮추어 대등을 지향하면, 누구나 지닌 창조주권을 발현할 수 있어 선진적인 역량이 확대된다.  
 
중국을 나무라려고 무리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대국이 자랑으로 삼는 패권주의는 동서고금 어느 경우에든 같은 성향을 보인다. 밖으로는 분란을 일으키고, 안에서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기는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한다.  

순종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무리한 짓을 한다. 알아야 한다고 지정한 것은 누구나 알도록 강요하고, 몰라야 한다고 금지한 것은 아무도 모르게 한다. 이것은 인력을 엄청나게 낭비해, 무기력을 자초하는 자충수이다. 그러다가 강자는 스스로 망하는 길에 들어선다. 그 내막을 알아차리면, 피해를 당하던 약자가 반격을 어렵지 않게 시작하고 슬기롭게 성사시킨다. 

선후나 강약은 그대로 지속되지 않고 무리하다가 역전된다. 중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는 이런 이치를 분명하게 깨닫고 실행한다. 감사하다고 여기고, 보답해야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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