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진과 주체사상, 그리고 그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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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진과 주체사상, 그리고 그 비밀
  • 고성빈 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2.03.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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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빈 칼럼]

채널을 돌리다 보면 얼핏 정치꾼들의 꼴사나운 말싸움을 볼 때가 있다. 한쪽이 인상을 쓰면서 묻는다, ‘아직도 주체사상을 믿느냐, 그럼 북으로 가라’. 다른 쪽은 할 말을 간신히 찾은 듯, ‘21세기인데 아직도 냉전시대 색깔론이냐?’라고 받아친다. 양자의 떨떠름한 인상을 보면, 둘 다 주체사상이 무언지 아는 척하지만 정작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해서 끝까지 본 적이 없다. 

오래전, ‘국민’학교 시절 우리 학급은 영광(?)스럽게도 ‘반공 시범학급’이었다. 별거 아니다. 선생님과 우리가 며칠 고생 고생해서 각종 잡지에서 가위질한 반공 사진과 그림, 포스터를 가장 그럴듯하게 잔뜩 복도 게시판에 붙여 놓은 우수학급이라는 거다.

그런데, 무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가끔 쓴웃음이 나면서 잊지 못하는 게 있다. 그 게시판에 【공산주의의 원흉들】이라는 빨간색 큰 글자 밑에는 별로 무섭지 않은 ‘매력적인 수염을 기른 마르크스와 엥겔스, 대머리의 강인한 레닌, 콧수염의 스탈린, 빨간 별 모자 쓴 모택동’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게, 정작 그 뿔 달린 늑대라는 김일성 사진이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하도 무서운 사람이라 사진만 보아도 공산당 된다는 뜻이었을까. 당장에 누가, ‘너 김일성 사진 보면 북한으로 보낸다.’ 이렇게 소리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마 당시 정치꾼들은 그것을 노렸을 것이다. 

물론 세월이 흘러 그 ‘반공 우수학급’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아련한 추억 속의 코미디인 게 드러나고 말았지만. 당시만 해도 내가 먼 훗날 그 원흉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그야말로 ‘주체’적인 인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왜,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오늘날도 ‘주체사상’ 논쟁에서 묻는 놈이나 그 앞에서 대답이 딸려 쭈뼛거리는 놈이나 사실은 김일성 사진도 안 보고 뿔 달린 괴물이냐 아니냐 헤매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하긴, 개돼지 같은 백성을 지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무식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초중고교에서 주체사상에 관한 교육도 안 하면서 ‘주체사상 좋으면 북한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꼬마들에게 사진(주체사상)도 안 보여 주면서 ‘너 김일성이 뿔 달린 것도 모르냐, 그럼 북한 가서 살라’라고 협박조로 큰소리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뿔이 있는지 없는지는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주체사상도 알아야 숭배를 하든지 비판하든지 할 게 아닌가. 단언컨대 남쪽 시민과 탈북자마저도 주체사상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무조건 저주하거나 숭배만 해야 하는 절대로 보면 안 되는 사진과 같은 신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학교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배우고 그에 관한 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야 자기만 아는 척하는 주체 장사꾼에게서 ‘북으로 가라’는 황당한 말을 안 들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오래전 외국에서 북한판 『주체 정치학』을 읽은 적이 있다. 외국 잡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나니 그가 어떻게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듯이, 그 책을 읽고 나니 주체사상을 비평할 수 있었다. 요즘은 그나마 다행히 구글에 떠 있기는 하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비판하려면 우선 기본적으로 철학에서 ‘주체’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즉, ‘주체’적 의식이라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외부에 의존하는 게 아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의식에 도달한 상태’를 말함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이란 사실 가장 비주체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인민 개개인을 자주적인 주체가 아니라, 유일무이의 수령에게 부속된 수많은 하위 주체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김일성 사진을 자기만 본 척, 주체사상을 자기만 아는 척하면서 ‘북으로 가라’고 뻥치는 장사꾼에게 말해 줄 게 있는데, 당신이 아는 척하는 주체사상은 북한의 전용이 아니다. 이름만 조금 다르게 하면서 그저 그렇게 역사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많은 구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러한 비주체적 주체사상들은 역사가 오래되었고 심지어 남한에도 있다. 북한만의 독점 상품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체사상의 ‘수령론’보다 더 오래된 일본 주체사상이 있다. 눈치로 알 것이다. 옆 나라 보수들은 ‘천손강림, 만세일계, 팔굉일우’를 모토로 하는 ‘존황론’을 내세운다. 북한이 나와 국가의 주체가 곧 수령에서 나온다는 ‘수령론’으로 살고 있듯이, 일본은 일왕이 곧, 나와 국가의 주체(국체)라는 존황론을 존숭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식 버전의 주체사상도 있다는 거다. 

한국의 보수들이 극혐하는 미국의 커밍스(Bruce Cumings)는 북한을 “유교적 가족국가”로 표현하면서,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다. 보수의 생각에는 ‘신성한’ 유교를 ‘사악한’ 북한체제에 적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유교를 너무 이상적으로만 보는 편향성의 오류이다. 한국의 현자인 퇴계와 율곡 선생마저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는 조선식 주체사상을 내면화하면서 유교적 전제국가에서 살았다. 유교국가에는 이상적인 위민사상도 있었지만, 군주가 굳건해야 천하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하다는 ‘존군론’이라는 현실주의도 있었다. 커밍스가 의미한 바는 김일성 수령(만백성의 아버지인 임금)을 정점으로 간부(신하)와 인민이 가부장제적 질서를 이루어 체제안정을 이루고 있는 게, 마치 유교적 전제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민본주의적 유교사상으로 북한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니었다. 

그러면 남한에서 주체사상을 비즈니스로 살아가는 보수 장사꾼들의 주체는 무엇일까. 북한판 주체 상품을 비판한다면 나의 주체를 자각하고 있어야 하는 게 출발점일 것이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북한 가라’고 떠드는 주체 장사꾼들일수록 ‘한미동맹’을 자신의 주체(수령이자, 천황폐하)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정작 미국인도 ‘한미동맹이 그들의 주체’라는 것을 알면 실소를 터뜨릴 일이다. 웃기지 않는가. 자기 주체도 없는 인간들이 남들에게 주체 장사판을 벌이고 있다니.

유교국가에서 사약을 받으면서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나, 가미카제 특공대가 죽음의 동기와 목적도 모른 체 벚꽃처럼 산화하면서 ‘천황폐하 만세’라 외치는 것이나, 북한에서 전 인민이 ‘수령님 만세’ 외치는 것이나, ‘세상만사 한미동맹’을 외치는 한국 보수들이야말로 모두가 역사 속에서 ‘나의 운명을 나 자신이 개척할 수 없는 비주체적 주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른바, 우리가 주체적으로 북한과 대화하자는 것은 이미 철 지난 존왕론인 주체사상을 숭배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미사일 불장난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의 전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남북이 불화하면 할수록, 주변에 속이 시커먼 나라들에 의해 더욱 “이용만 당하기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을 간파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에는 혈통이 같은 형제자매와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남쪽의 주체적 인간들이 그들을 비주체에서 주체로 이끌어야 하지 않나.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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