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진아론을 통한 한국 근대유학사상의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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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진아론을 통한 한국 근대유학사상의 정립
  • 박정심 부산대학교·한국근대사상
  • 승인 2022.02.1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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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박은식 : ‘양지’로 근대를 꿰뚫다』 (박정심 지음, 학고방, 356쪽, 2021. 12

 

1. 타자중심주의 파고 넘어서기

‘망국’은 한국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한국 근대는 실패한 역사인가? 망국이 치욕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하나, 그렇다고 ‘실패’로 치부할 수는 없다. 흔히 근대를 ‘서세동점의 시대’라고 한다. 근대를 표상하는 이양선과 철도, 그리고 시계 등은 모두 낯설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양선(異樣船)은 모양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대포와 그리고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발달한 유럽 근대문명이 함축되어 있었다. ‘문명civilization’은 유럽의 민족주의적 보편주의를 담고 있는 역사적 개념으로, 근대 유럽의 삶의 총체이기도 하였다. 이성적 사유와 과학적 진리에 기대기만 하면 인류가 진보 발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발전에 기댄 서구 근대문명은 유럽 국가들의 우월성을 입증할만한 것이라고 여겼다. 가장 진보적인 국가 지역 인종이 유럽국가의 백인종인 반면, 비서구 지역은 문명적으로 열등하고 야만적이며 비이성적인 흑인종이거나 황인종이었다. 이러한 근대 유럽 국가들의 사유를 유럽중심주의라고 한다. 

서양 근대를 배제하고 근대를 논하는 것은 어렵지만, 서구적 근대만이 유일한 근대라고 여기는 것 역시 유럽중심주의적 사유이다. 비서구지역의 근대가 곧 서구적 근대를 그저 모방하거나 번역한 것이라고 파악한다면, 비서구지역은 주체적으로 역사를 추동해나갈 수 없는 비주체적이고 피동적인 타자에 불과하다. 서구적 근대를 유일한 전범으로 삼아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한국 근대를 ‘실패’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유럽중심주의의 재생산이다. 

한편 아시아의 영국이 되고자 했던 근대 일본은 유럽중심주의를 재생산한 동양주의를 통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가 해체된 자리에 일본우월주의적인 동양주의를 옹립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이 열등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선진문명을 지도하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조선 성리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통해 열등한 ‘조센징 만들기’에 집중하였다.  

한국은 중화주의를 비롯하여 유럽중심주의와 동양주의라는 타자중심주의의 자장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했다. 보편타자에 매몰당하지 않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한다면 한국인은 이성적 사유 능력이 부재한 열등한 야만일 수 있고, “우리는 동양의 황인종이다”라고 한다면 동양주의적 사유에 매몰당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한다면, 자칫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타자와 구별되는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말해져야 하는가? 유럽중심주의와 식민주의의 중층적 왜곡을 넘어서야 비로소 ‘나는 나이다’를 말할 수 있다. 

박은식(1859-1925)은 중층적인 타자중심주의 파고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던 근대사상가이다. 박은식은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국 근대사상가이기도 하다. ‘『박은식: 양지로 근대를 꿰뚫다』’는 그의 사상적 가치와 현재적 의미를 탐색한 저서이다. 


2. 진아와 한국 근대

근대적 격변은 삶의 양식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인간과 삶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주자학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던 박은식이 이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근본적인 이유는 성리학이 ‘근대’라는 새로운 ‘지금 여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은식은 문명사적 전환기에 양명학적 사유를 통해 근대 자체를 문제 삼았다.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핵심 사상이다. 그는 양지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통해, 근대적 주체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유학을 근대적 시중지도로서 자리매김하였다. 

            백암 박은식 선생 ⓒ wiki commons

철학적으로는 새로운 인간 주체를 발견했다는 점이 근대의 가장 큰 변화였다. 서구에서는 계몽주의적 이성 주체가 철학의 중심이었다면, 한국 역시 근대적 주체를 정립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했다. 박은식 또한 ‘근대’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주체를 모색하였으나, 그것이 서구와 같은 ‘독립된 개인’의 발견은 아니었다. 박은식은 시비 판단의 준칙과 실천성을 담보한 양지의 근대적 구현체인 진아(眞我)를 한국 근대 주체로 상정하였다. 그가 제시한 ‘양지’는 계몽이성과 마주한 개념이었다. 물론 그가 계몽주의 철학에 대해 구체적인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계몽이성을 유일한 보편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그들처럼 되기’, 하나였고, 이광수의 경우처럼 그것은 문명성이 부재한 결핍된 타자로 귀결되었다. 박은식은 양명학으로의 사상적 전환을 통해, 보편타자의 ‘밖’에서 그와 마주 선 주체로서 ‘진아’를 주창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진아’는 박은식 사상을 관통하는 중심 개념이라고 하겠다. 

진아는 양지를 실현하는 도덕적 주체라는 차원에서 유학적 보편성을 담보하였으며, 또한 민족적 주체성[自家精神] 및 문화적 정체성[國魂]을 견지하면서 독립과 세계평화를 구현한다는 차원에서는 민족적 주체성과 정체성을 담지한 한국의 근대 주체였다. 한국의 근대 주체 진아는 근대적 지금 여기에 대한 통찰 속에서 주체적 자기를 발견하고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현실 문제를 직시하였다. 서구 근대과학의 효용성을 수용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자강론을 전개하였고, 또 망국의 위기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운동을 실천하였다. 근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가정신과 국혼을 강조하였지만, 팽창적 민족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진아는 지금 여기란 자기 삶의 맥락을 중심에 놓지만, 그 중심이란 나와 너의 올바른 관계맺음을 기반으로 서로의 다움을 실현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 양지적 주체는 나다운 나〔인〕가 되어, 너다운 너〔인〕를 인정하며 너와 동등한 관계맺음을 할 때 비로소 참된 주체가 된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국가와 세계적 차원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그는 한국 독립이 대동평화와 인류 평등을 구현하는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적 만물일체지인이다. 근대적 인이란 각자의 다움을 통해 올바른 관계맺음을 함으로써 세계평화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박은식은 양지적 주체가 한국의 독립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자국팽창주의로 귀결되지 않고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진아론은 이성적 주체란 보편타자에 매몰되지 않은 한국 근대 주체를 정립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철학적 진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진아론의 현재적 의미

지금 우리는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전근대 및 근대적 유산을 새롭게 성찰할 필요가 있는데, 박은식의 진아론을 통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진아론은 전근대 유산인 주자학적 맥락을 탈피하여 근대적 자장 속에 유학 이념을 재정립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둘째, 이성적 주체에 매몰당하지 않고 주체적인 자기 이해를 정립했다는 것이다. 진아는 이성적 주체와 달리 타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원리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경계를 향유하면서도 근대 너머를 지향했다고 하겠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박은식이 과학자들이야말로 발본색원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누구든 양지라는 ‘공정한 감찰관’의 권능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지만, 특히 과학자들의 양심과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군국주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따라서 박은식은 과학기술주의 시대에 철학의 역할은 견문지에 대한 본연지적 성찰이라고 간파하였다. 과학기술의 효용성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다움과 평화적 연대 그리고 각득기소(各得其所)를 위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물론 그가 오늘날 기술철학의 담론처럼 정치한 이론적 체계를 정립한 것은 아니지만,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근대 과학기술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체험하였다. 그는 적어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군국주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견문지에 대한 본연지적 성찰을 통해 유학이 그러한 문제점을 통찰할 것을 요구하였다. 

망국의 경험은 치욕스럽고, 다시 겪지 말아야 할 역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침략의 역사를 유산으로 받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만약 일본처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 없이 평화를 말한다면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와 연대를 잘 말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비폭력의 유산이야말로 무엇으로도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가 있다. 평화와 연대를 말할 수 있는 사상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북문제를 비롯하여 기후변화 등 국제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말해야 할 것’ 또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박은식은 이런 질문에 하나의 혜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박정심 부산대학교·한국근대사상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 근대사상과 유학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근대사상사』, 『단재 신채호:조선의 아 비아와 마주서다』가 있으며, 『한국철학사: 16주제로 읽는 한국철학』, 『한국철학사상사』, 『한국실학사상사』, 『동아시아 개념연구 기초문헌해제 Ⅲ』, 『동아시아지식학의 세계를 열다』 등의 공저와 『역주 호락논쟁 1』, 『역주 호락논쟁 2』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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