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의 응집력 퇴화와 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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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의 응집력 퇴화와 천황제
  • 김지영 서울시립대
  • 승인 2022.01.01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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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절망의 유토피아: 내셔널리즘과 천황제로 본 현대 일본』 (오구라 도시마루 지음, 김지영 옮김, 푸른길, 220쪽, 2021.11)

 

2000년 이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고이즈미 내각이 추진하는 구조개혁을 통해 서비스의 주체가 ‘관에서 민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었다. 정치 변화를 통해 경제 분야 역시 신자유주의가 일본 사회에 자리 잡게 되면서 기업의 이윤 극대화와 합리적인 경영이라는 목표 아래 고용구조가 크게 바뀌었다. 정치와 경제의 변화는 일본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일본 사회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식어가 ‘1억 총 중류사회’에서 ‘격차사회’로 변한 것을 들 수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진 1990년대 이전까지 장기 고도성장을 이어간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영국과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작은 정부로 전환했던 그 시기에도 일본은 여전히 자민당 중심의 정치, 일본식 경영 시스템으로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세계 최고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일본식 시스템은 세계화 시대에 돌입한 1990년대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고이즈미 내각이 들어섰던 2001년부터 2006년은 자유주의를 필두로 하는 세계화의 흐름과 일본식 체제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은 일본식 체제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성공의 경험을 축적한 국가이기도 하고 바로 그 성공의 경험 때문에 세계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여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국가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성공의 경험에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경제적인 격차가 두드러지지 않고 일본인 또는 일본 사회라는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고 반대로 실패의 경험에는 그동안 구축해 왔던 일본 사회의 경제적 또는 인식 수준의 응집력이 크게 퇴화하여 더는 일본식 체제가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천황제도 현대 일본이 겪었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염두에 두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저자가 다양한 시기에 걸쳐 집필한 글이 모여 있고 학자가 살아가는 시대의 특성은 학자의 사고 체계 및 분석 관점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천황제는 ‘일본 사회의 응집력’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지만 일본 사회의 응집력이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세계화 시대에서 가장 큰 도전을 받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일본의 천황제를 분석하는 관점은 이 두 시기에 어떻게 달라졌을까? 여기서는 일본식 체제가 성공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던 시기(1991년)에 집필된 제1장과 실패를 거듭하고 있던 시기(2009년)에 집필된 제4장을 대비하면서 독자가 눈여겨 볼만한 천황제의 특징 두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제1장에서 분석하고 있는 천황제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덤’이지만 ‘덤’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의 천황제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국가통합의 도구로 활용한 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천황제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 초기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와 일본인의 응집력을 만들어내는 핵심 기제로 자리 잡게 되었고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연합군 최고위 사령부의 간접통치를 받으면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 나가는 동안 천황제는 신격을 벗고 상징으로만 존속하게 되었고 다시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즉,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라는 ‘덤’의 자리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천황제는 ‘일본인=일본국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국민통합 장치였기 때문에 ‘일본인=일본국민’이라는 개념 자체의 재정립이 일어나지 않는 한 ‘덤’의 자리로 물러나기 어려운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아무리 천황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 정치나 권력과 무관한 ‘덤’과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덤’이라는 감각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는 결과적으로 천황제에 대한 진중한 논의도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황제를 진지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이 일본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일본인=일본국민’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국적의 개념이 아니라 천황과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며 일본 사회의 응집력이 천황제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제1장의 천황제가 ‘덤’이라는 비유로 소개되는 데 반해 일본식 체제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시대의 천황제는 일본의 경제적 풍요를 더는 재생산 할 수 없는 ‘기능부전’에 빠진 장치로 소개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천황제가 상징적인 형태로나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의 경제적 풍요와 국민통합의 상징인 천황제가 절묘하게 짝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경제적 풍요를 재생산 할 수 있는 우월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 역시 고도성장기 내내 일본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제4장에서 저자는 일본의 천황제가 고도 성장기동안 경제제국주의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일본의 전쟁 의존 체질을 은폐하고 평화를 위장해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와 같은 위장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 시점을 세계화가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로 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경제적 풍요의 상징이었던 천황제가 기능부전에 빠지면서 천황제는 새로운 역할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헤이세이 천황인 아키히토 천황이 이전과는 다르게 황실외교에 힘쓰며 신자유주의 정책의 도입으로 대표되는 일본 기업의 세계화와 일본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한 점이다. 그러나 저자는 일본 경제의 세계화를 통해 일본의 구성원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이라는 존재를 통해 일본인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지속되면서 결국 일본 내의 자민족 중심주의=차별 의식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몇 년 전부터 일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문제와 외국인에 대한 인종주의 강화 역시 천황제의 존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천황제는 ‘일본인’이라는 응집력을 만들어낸 핵심적 기제이고 이러한 기제가 폭발적으로 발휘된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그러나 현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점뿐만 아니라 이 모든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 즉 세계화 시대 이후의 변화 역시 들여다봐야 한다. 이 책은 일본의 응집력의 기반에 있는 천황제가 이 두 시점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가에 대해 분석하면서 현대 일본 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는 천황제의 ‘덤’으로서의 성격이 갖는 문제와 ‘기능부전’의 문제라는 두 가지 문제만 다루었지만, 앞으로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이 『절망의 유토피아』를 통해 현대 일본 사회와 천황제의 연결고리를 더 많이 발견해내고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자원을 더 많이 획득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김지영 서울시립대·도시사회학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 초청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전공은 다문화와 사회통합, 일본지역연구이다. 주요 저서로는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 재난과 공공성의 사회학』(공저),『공정한 사회의 길을 묻다』(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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