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에서 어울림으로”…다양성은 공존을 목표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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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서 어울림으로”…다양성은 공존을 목표로 해야 한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12.07 0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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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과 어울림: 공존을 위한 사회적 다양성 | 민지영·허태균·신혜린·박지훈·이대현 외 8명 지음 | 동아시아 | 308쪽

 

사회적 다양성은 세계적 흐름이자 시대적 요구다. 한국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양성은 이미 일상이 되었기에, 그것의 옳고 그름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양성을 실현할 것인가’를 말이다.

이 책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상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다룬다.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보고, 본 것을 말하고, 그렇게 배우고, 배움을 통해 일을 한다. 「생각하다」, 「보다」, 「말하다」, 「배우다」, 「일하다」의 다섯 장으로 구성된 책은 일상을 따라가면서 편견, 소외, 차별이 현실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아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생각하다」에서는 고정관념과 알고리즘을 통해 ‘편견’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보다」에서는 대중매체에서 ‘소외’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말하다」에서는 말과 문자에 담긴 ‘차별’을, 「배우다」에서는 다양한 ‘관점’을 추구하는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마지막으로 「일하다」에서는 과학연구소에서의 여성과 사회적기업에서의 취약 계층이 어떻게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생각하다」에서는 의식하기 어려운 고정관념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리고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내재한 편견을 다룬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차별적 위계’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강자와 약자를 나누고, 이를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관념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소외로 이어진다.

「보다」에서는 드라마, 영화 등 대중매체에서 소수자가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말한다. 동성애자가 주연인 영화는 괜찮지만 동성 간 키스 장면은 안 된다는 논리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나아가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이율배반적인 면을 보여준다. 2020년 여대의 일부 학생들이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거부한 사건은 이러한 미디어의 시선이 현실에 그대로 나타난 사례다.

「말하다」에서는 한국어 특유의 높임법에 주목한다. 조선시대, 즉 신분제 사회에서 평민은 양반에게 높임말을, 양반은 평민에게 반말을 사용했다. 높임말과 반말은 권력의 위계가 담긴 표현 방식이다. 그런데 신분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우리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분하고 위계에 따라 높임말과 반말을 주고받는다. 영어식으로 부르냐 한국식으로 부르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분하여 신분제에서나 할 법한 차별적 언어 습관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배우다」에서는 교수자가 아이들을 대할 때 신경 써야 할 것을 교육 현장의 실무자 관점에서 제시한다. 이를테면 유전에 대해 가르치면서 “자녀는 부모와 유전적 정보가 유사하기 때문에…”라고 한다면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이나 입양된 아이들은 은연중에 비정상으로 규정되고, 다른 아이들은 이를 학습하게 된다. 따라서 ‘생물학적 자녀’라고 명시해야 한다. 단어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세심함이 불편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은 불편함을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그것이 올바르기만 해서가 아니다.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일하다」에서는 다양성이 어떻게 경쟁력이 될 수 있는지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 주 소비층은 남자 아이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했고, 자연스레 개발자와 이와 관련된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학생, 연구자 모두 남성이 주류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소비층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오히려 경쟁력을 저해한 것이다.

혁신의 원동력인 사회적 다양성은 세계적 흐름이자 시대적 요구다.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어느덧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때론 이것이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책이 경계한 것은 ‘타자화’다.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소수자를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낙인찍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자고 할 때, 장애인에게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강요되면서 이들이 비장애인의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 장애인이 장애인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를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나아가 성별, 성적 지향, 피부 색깔, 출신 지역 등의 이유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타자화를 경계하기 위해 저자들은 남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 집중하고, 책은 다양성에 대한 여러 논제 중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는 대신 여러 주제를 다룬다. 그럼으로써 다양성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사회적 다양성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다름이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두가 공존하기 위한 어울림으로 나아갈 때, 사회적 다양성은 비로소 우리의 일상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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