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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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판단한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1.2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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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중심리 | 귀스타브 르 봉 지음 | 강주헌 옮김 | 현대지성 | 296쪽

 

“당선될 수만 있다면 과장된 공약을 남발해도 괜찮다. 유권자는 공약에 박수를 보낼 뿐 얼마나 지켰는지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흑색선전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주되 증거를 찾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여론이 협박으로 돌변해 정치인의 행동 노선까지 바꾼다.” 오늘날의 정치 행태를 꼬집은 것 같지만 사실은 19세기 말에 귀스타브 르 봉이 쓴 책, 『군중심리』에 담긴 내용이다. 사회상과 군중에 대한 그의 분석은 21세기인 지금과 견주어도 이질감이 전혀 없다.

군중에 관한 연구서 중에서 이 책이 돋보이는 이유는 실천적 논의의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르 봉은 군중의 실체를 예리하게 꿰뚫을 뿐만 아니라 의도한 방향으로 그들을 이끄는 강력한 원리를 제시한다. 르 봉은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등 역사의 격랑을 겪으면서 군중의 힘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군중은 단지 같은 장소에 운집한 무리가 아니라 특정 감정이나 신념에 따라 결합된 ‘심리적 군중’이다. 군중에 속한 개인은 고유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충동적으로 사고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먹물깨나 먹었다는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다. 군중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메타버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군중심리』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르 봉이 말한 ‘심리적 군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금껏 이해하기 어려웠던 팬덤 정치, 온라인 여론 형성 과정, 심지어 종교와 정치의 광기 등 최근의 여러 현상에 관해 명확한 관찰과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예비군 효과”라는 말이 있다. 멀쩡한 사람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껄렁대면서 일탈하는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악플러들을 붙잡아 조사했더니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던 훌리건의 상당수는 소심한 자들이었으며, 개인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성품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소속 집단의 편향된 여론에 휩쓸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등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다.

개인은 왜 군중에 속하면 개성을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까? 여기에 답하려면 군중의 정의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책의 연구 대상인 군중은 우연히 모인 사람 무리가 아니라 집단정신이 형성된 단일체로, 저자는 이를 ‘심리적 군중’이라고 부른다. 군중에 속한 개인은 ‘군중의 정신을 단일화하는’ 심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개인의 신념을 지키기보다는 외부 상황이나 주변의 분위기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렇게 익명성을 띤 군중은 자제력을 잃고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집단 이익을 꾀한다는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내던진다.

르 봉의 연구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와 같은 현상을 나열한 데서 그친 게 아니라 군중심리를 지배하는 힘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군중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끄는 원리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군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단순하고도 자극적인 이미지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통치자들은 대부분 강렬한 이미지로 군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사람들이었다. 군중은 이들이 보여준 이미지를 통해 각인된 사상과 신념을 지키고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왔다.

또한, 군중의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따라서 논리로 그들을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자극할 만한 감정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암시된 이미지를 환기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군중을 이끌 수 있다. 무엇보다 개성을 잃어버린 군중 속 개인은 강력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본능적으로 추종한다. 그래서 군중은 지극히 반항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더없이 순종적이다. 만약 지도자가 확언, 반복, 전염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군중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가 발전하고 메타버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군중은 ‘공간적’ 결합체가 아니라 ‘심리적’ 결합체라는 르 봉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정치인에 대한 맹목적 지지나 세대·계층·젠더 갈등처럼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들부터 특정 이슈에 대한 쏠림 현상, “돈쭐”과 “혼쭐”로 대변되는 소비자 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르 봉의 통찰이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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