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을 거부하는 뮤지컬, 〈바바리맨: 킬 라이크 아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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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거부하는 뮤지컬, 〈바바리맨: 킬 라이크 아이 두〉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1.11.22 0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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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사진 제공: 극단 그린피그

<바바리맨: 킬 라이크 아이 두>(윤미현 작, 나실인 작곡, 윤한솔 연출, 두산아트센터·그린피그 제작, 두산아트센터 Space 111, 2021. 11. 09~11. 27. 이후 <바바리맨>)는 뮤지컬 되기를 거부하는 뮤지컬이다. <바바리맨>에 대한 첫 인상은 이 아이러니한 지향성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질문하게 된다. <바바리맨>은 왜 하필 뮤지컬로 만들어졌을까? 

뮤지컬은 ‘노래로 말을 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노래와 드라마의 경계를 보이지 않게 하여 공연의 흐름을 최대한 유연하게 만들 것을 목표로 한다. 관객은 배우의 노래와 춤을 보게 되지만 배우는 드라마의 흐름 안에 결합되어 있는 노래와 춤을 극적 맥락 안에서 퍼포밍하는 것이 뮤지컬이다. 일반적으로 뮤지컬은 이 법칙을 핵심에 두고 인물과 상황을 압축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모색한다. 대부분의 뮤지컬이 ‘관객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드라마와 인물형을 조율하고 장면 사이의 응집력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것은 대중예술로서의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극단 그린피그

그런데 <바바리맨>은 위의 기준과 지향을 보란 듯 뛰어 넘는다. 1번 넘버 ‘빈 손목’부터 명확하다. ‘빈 손목’은 김박철(박기원)이 종로 파고다공원 앞 ‘생활물가 잡기 범국민 궐기 대회’ 시위 현장에서 우연히 손녀 호미(박유진)를 만나는 첫 장면에서 가창된다. 생활비 벌겠다고 일 나갔다가 쓰러져 죽은 아내(호미의 할머니)의 이야기를 호미에게 전하는 ‘빈 손목’은 벌스(verse)와 클라이막스가 정확히 구분되는 전형적인 뮤지컬 스타일로 작곡되어 있으며, 또한 박기원 배우에 의해 전형적인 대극장 벨칸토 창법으로 가창된다. 심지어 김박철이 ‘빈 손목’을 부르는 동안 시위를 하던 노인들은 김박철의 ‘노래’에 환호한다. 노래가 인물의 말이 아니라 시위 현장의 ‘공연’처럼 활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빈 손목’은 김박철의 사연과 사실 크게 관계가 없는 것처럼 들리며 극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뮤지컬적 요소’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제공: 극단 그린피그

이런 방식으로 <바바리맨>은 공연 전체의 노래와 춤, 그리고 드라마의 이음새를 가르고 각각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관객과 호흡한다. 소극장 무대에서 대극장 뮤지컬의 안무와 퍼포먼스가 다소 조악해보일 정도로 활용되고, 조명은 배우들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그러니까 결코 뮤지컬 무대에서처럼 배우의 얼굴을 폼나게 ‘조명’하지 않는다), 극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되는 앙상블 배우들은 때로는 헉헉대며 또 때로는 웃으며 공연 중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또한 앙상블 배우들은 돌아가면서 나레이션을 맡는다. 극 안에서 인물로 존재하다가 다음 장이 시작될 때 극 밖으로 빠져나와 상수 쪽 회전무대 위에서 나레이션을 하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식이다. 관련하여 무대 전면에 커다란 글씨로 ‘여기가 어디인지’ 이야기해주는 영상 활용도 눈에 들어온다. 이 모든 연출 방식은 매끈하게 정리된 뮤지컬을 분해하여(혹은 그 관념을 분해하여) 각 요소들을 투박하게 나열함으로써 관객의 정서적 몰입을 방해한다. 이를 브레히트의 서사적 음악극 문법이라 굳이 칭하지 않아도 그 효과는 이에 필적할 만큼 강력하다.  

 

사진 제공: 극단 그린피그

<바바리맨>의 이런 양식적 선택은 사실 공연이 제기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연은 중학교 2학년인 호미와 궁전(김민주)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다. 호미는 치솟는 생활물가를 때려잡는 것만이 삶의 대안이라 생각하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그런데 호미의 이 생각은 비정상적인 부모를 둔 열악한 환경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호미의 아빠 바바리맨(임진웅)은 바람을 피워 집을 나가 버렸고 호미의 엄마(황미영)는 이런 남편을 잊지 못해 사랑타령만 하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한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와 사는 호미는 집의 규모를 계속 줄이면서 이사 다니는 현실이 지겹고 엄마의 무능함이 지겹고, 그래서 치솟는 물가가 원망스럽다. 그런데 이들 가족에게는 반전이 있다. 사실 호미의 할아버지 김박철과 바바리맨, 그리고 엄마는 모두 차력사로서 형사들한테 하청을 받아 범인을 잡아주는 불법적인 일을 하는 가족 집단이다. 이 직업 같지 않은 직업이 불법임을 알고 있는 이들은 호미에게 정체를 숨기고 살고 있는 중이다. 한편 궁전이 역시 중학교 2학년 여학생, 호미의 친구다. 궁전이는 낮에는 야쿠르트를 팔며 밤에는 밤을 까는,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가진 엄마랑 산다. 그런데 이 가족에게도 남모를 사연이 있다. 사실 궁전이는 강남에 아파트를 가진 부잣집 딸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이사만 23번을 다녔다. 이혼한 남편을 잊지 못해 그를 따라 다니는 엄마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301호 아저씨-아빠는 옥수동, 잠원동, 자양동 등등으로 따라다니며 바로 옆에 붙어 살았던 궁전이를 전혀 인식조차 못한다. 그래서 궁전이는 자신이 마치 ‘먹다 뱉어버린 수박씨’ 같지만 그럴수록 더 강인하게 자라고 있다고 외친다. 

 

사진 제공: 극단 그린피그

이런 두 가족의 사연은 궁전이가 301호 아저씨를 살해하는 사건에서 만난다. 유튜버의 이야기에 경도되어 학교도 나오지 않고 ‘생활물가 때려잡기’ 데모를 하려 다니는 호미는, 순진하게도 청산가리를 먹는 퍼포먼스를 벌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자는 집회 대표의 말을 믿고 그대로 실행하려 한다. 이 계획을 알게 된 궁전이는 호미의 청산가리를 몰래 교복치마 주머니에 털어 넣고 이걸로 301호 아저씨를 죽여, 자신을 괴롭히던 엄마의 ‘진부하고 음탕한’ 감정을 끊어내고 스스로 비하의 감정을 갖게 만들었던 근원을 없애버린다. 우연히 형사로부터 이 사건을 맡은 차력사 세 명은 사건을 조사하다가 궁전이 엄마의 ‘진짜 사랑’을 알게 되고 호미에게 돌아가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호미 엄마는 감정보다 생활비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공연은 바바리를 입고 중절모를 쓴 바바리맨과 김박철이 호미네 학교 정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엄마에게 고발당해 수감 중인 궁전이와 여중생들에게 날라차기를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은 그야말로 쌍팔년도에나 출몰했던 ‘바바리맨’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극단 그린피그

<바바리맨>의 세계는 이렇듯 조소와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은 해체되어 있고 공권력은 약자들에게 기대어 힘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파트는 하나 남은 삶의 희망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사랑은 극단적인 이기심의 다른 모습이다. 이 비틀어진 세계가 지금-여기의 동시대를 환기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장 주목할 것은, 공연의 제목이 ‘바바리맨’이며 부제가 ‘킬 라이크 아이 두(Kill like I do)’라는 점이다(부제는 윤한솔 연출이 덧붙였다고 한다). 이 전체 제목에서 “내가 한 것처럼 바바리맨을 죽여 봐”라고 말할 법한 궁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더 확장하자면 넘버 8번, ‘저 집’에서 울려퍼지던 “미친 염병할 인간들이 바바리코트 입고 별짓들을 다 하네”라는 앙상블의 노래가 들린다. 공연은, 삶을 비틀어버린 기성세대에게 린치를 가하는 여학생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기성세대는 간단히 뻘짓을 하는 ‘바바리맨’으로 희화화한다. 차력사 세 명은 쉬지 않고 짜장면을 먹다가 전봇대에 줄을 달아 입으로 당기는 훈련의 루틴을 만들고, 301호 아저씨의 죽은 몸은 발만 있고 얼굴이 없는 시체로 형상화되며, 바바리맨이 범죄 사건을 하청 받는 현장은 택배기사들이 배달 전 미어터지게 좁은 공간에서 대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이 없이 웃기면서도 짠한 장면들이다. <텃밭킬러>, <젊은 후시딘>, <할미꽃 단란주점 할머니가 멜론씨를 준다고 했어요> 등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윤미현 작가의 ‘뉘우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고, 윤한솔 연출과 극단 그린피그의 불온한 상상력은 뮤지컬 양식을 왜곡시킴으로써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실인 작곡가의 음악은 발라드, 스윙, 그리고 팝과 록을 담아 다양하게 펼쳐지며 장면의 색깔을 만든다. 이 공연이 뮤지컬을 거부하는 ‘뮤지컬’로 호명될 수 있는 이유다.

 

사진 제공: 극단 그린피그

윤미현 작가는 자신의 희곡을 서울시오페라단의 <텃밭킬러>(2019), 국립오페라단의 <빨간 바지>(2020)와 같이 오페라로 만든 경험을 갖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바바리맨>을 뮤지컬로 만들 것을 먼저 윤한솔 연출에게 제안했다. 작품 세계의 DNA를 유지하면서 뮤지컬로 영역을 확장한 이들의 작업은 취향과 양식, 그리고 이야기의 패턴이 확고히 자리 잡은 대학로 소극장 창작뮤지컬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 뮤지컬에는 열등감에 몸을 떨거나, 가스라이팅을 하거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을 받거나, ‘나’의 유니크함을 강조하는 인물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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